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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다정이 Apr 18. 2020

0.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

2017.12.22

영화 리뷰를 다시 이어가기 위해 2017년의 맨 처음부터 쌓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



그런 자격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꾸준히 책을 읽지는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나는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건 내 이야기다.


나는 영화든 책이든 무언가를 보고 읽는 걸 좋아는 하는데 그 횟수가 잦지는 않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꽤 남발하며 말하는 사람이었다. 자격의 여부를 떠나,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그런데 요즘 들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골몰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지금보다 나이가 더 어렸을 때, 그래서 아직은 내게 남은 시간이 충분하다고 느꼈을 때, 비록 경험은 미진할지언정 무엇인가를 좋아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 들어 나는 말이 없다.


무엇을 좋아해!



따위의 말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겸연쩍은 기분 때문이다. 내가 정말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나는 그것을 오래토록 마음에 새기고 있었나,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는 데서 오는 겸연쩍음. 이 겸연쩍음은 비단 경험이 적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도 있었던 경험조차, 나의 알량한 뇌만 믿고 마냥 흘려보내었기 때문에, 가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좋다고 느꼈을 때마다 ‘…!’와 동시에 ‘~~’ 해버렸다. 그래서 이제와 나는 무엇인가가 분명히 아주 좋았던 것 같은데, 왜 좋았는지, 어떻게 좋았던 건지 야무지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무언가를 꾸준히, 정기적으로, 성실히 해본 일이 별로 없는 나는 내 삶의 기억이 너무도 옅어서일지, 무언가를 말할 때마다 꽤 자주 쭈구리가 된다. 내 기분, 내 감정, 내 생각에 대한 확신을 하지 못한 채로 어떨결에 무언가를 말해버린 사람처럼. 언젠가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도 내 곁에 남아 있는가? 의심은 습관이 됐다. 기억이 옅어질수록 말의 무게도 가벼워지는지. 말을 더듬는 건 예삿일이다. 그것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는 의심 많은 쭈구리와 말을 더듬는 사람을 좋아한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이 문장은 결코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 있었대도 이제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기억들로 내 삶을 채우는 건 무서운 일이다. 내가 무언가를 응시했던 순간들이 단편적인 기억으로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따금. 여태 쌓아온 시간 모두가 휘발될 것만 같고, 그럴때면 위태로워진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질문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록하기로 했다, 쉽게 휘발되지 않도록.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를. 설령 까먹더래도 언제고 찾아갈 수 있는 섬 하나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아마도 분명 나는 영원히 의심 많은 쭈구리에다 말도 무진장 더듬는 사람이겠지만 적어도 심지 굳은 목소리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 같은 것을 안고.   


굳이 영화를 선택한 건, 좋아한다는 마음이 무색하리만치 그에 대한 경험이 빈약한 것 중, 영화가 가장 압도적으로 빈약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기필코 자신만만한 씨네-필이 되는 것이 목표다.) 한편 영상학과 수료생이라는 신분 덕이기도 한데, 물론 이 신분이 앞으로 쓸 글들의 전문성을 보장하진 않는다. (영상을 전공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영화를 많이 모른다. 부모님, 미안합니다...)


다만 영화라는 시간 안에서 프레임이 켜켜이 쌓이고 쌓인 어느 지점, 내가 느낀 감정과 문득 들어버린 생각들을 솔직하게 적을 생각이다. 조악한 글일 것이다. 저 혼자 감상에 젖어 뱉어낸 아무말대잔치 같은. 그럴싸한 영화 리뷰보단 영화를 빗대어 내 일상을 난잡하게 발설해버리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대도 일단 기록해보기로 했다. 단단한 목소리이기 위해서.









2017.12.22.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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