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다정이 Apr 20. 2020

1. 당신의 거짓말은 오늘도 안녕한가요

2018.1.5

: 영화 <최악의 하루>로 변호해보는 거짓말의 세계





"긴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최악의 하루>는 개봉할 당시 영화관에서 보았다. 가만히 바라본 주인공 은희의 하루는, 제목 그대로 최악으로 치닫는 하루였다. 영화를 감상한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유난히 내 안에 남아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언젠가 A와 나눈 대화일 것이다.


영화관에서 <최악의 하루>를 보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친구 A를 만났다. 당시 종종 아무 대화를 나누곤 했던 A와 <최악의 하루> 이야기까지도 하게 되었다. A는 이 영화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A는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 화가 나서 영화관을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다고 했다. 최악의 하루를 겪은 은희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그런데 영화를 감상한 직후, 접속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너무 잘 보았다고, 위로가 되었다는 사람들의 코멘트가 가득해서 당황스러웠단다. A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하하, 웃었는데, A는 그런 경험으로 스스로를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새로운 발견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나 역시 이 영화를 너무 잘 보아서 위로를 얻었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A는 은희의 하루가 아니라, 뻔뻔하게 거짓말을 일삼는 은희가 최악이었다고 했다. 내가 이상한 건가. 그런 질문을 저 스스로에게 던지던 A는 내게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물어왔다. 나는 너무 좋았지. 나름 세상 진지한 고민을 하던 A 앞에서 너무 들뜬 목소리로 말해버린 것 같아 조금 겸연쩍어지려는 찰나에 A는 내게 물어왔다. 왜지?


…음, 화면이 예뻤고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고 카메라의 시선이랄지, 이런저런그런 것들이 좋았어…라고 말하는 사이에 슬쩍 은희를 변호하는 말을 끼어 넣었다. 누구를 대하냐에 따라 스스로가 달라지지 않느냐고. 이를테면, 친한 친구와 함께 있는 나와 부모님과 함께 있는 나가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처럼. A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거기에 덧붙였다. 그것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은희의 행동이. 그러자 A는 다부진 얼굴로 이것과 그건 다르지 않느냐고 했다. 그 모습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A는 참 단정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최악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났고, 자연스럽게 다른 말들을 나누었다. 마지막 학기라든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그런 숱한 말들을.


나는 종종 A의 말을 떠올리곤 한다. 이것과 그건 다르지 않느냐는 말을. 그 말은 분명 사실이다. 이것과 그건 같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은희의 난처함에 내내 마음이 동했는데, 왜 그랬던 걸까.




"그쪽이 저한테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아마도 내 삶의 방식이 거짓말 따위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A는 그런 나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최악의 하루가, 그 속의 은희가 불편했을 거라고. A는 친한 친구와 부모님을 한 곳에서 만나게 되면 나보다는 덜 당황하는 쪽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모두에게 일관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일관되지 않다’는 것만은 일관된 사람에 가깝다. 친한 친구와 부모님을 한 데서 만나면 어떤 게 나여야 할지를 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만 보는 애. 동시에 맞닥뜨린 두 남자 앞에서 갈팡질팡 어쩔 줄 몰라하다가 “아, 몰라아...”하고 주저앉았던 은희처럼.





은희가 관계를 맺는 방식이 복수(複數)의 것이랄까, 뭐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나의 경우, 은희처럼 다수의 연애 상대를 두었던 적은 없지만, 사람을 만날 때면 종종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된다는―은희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연극을 한다는 그 느낌일 때가 있다. 한창 사춘기일 때는 혹시 내 인격에 문제가 있는 걸까, 세상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 복수의 것들 모두가 나라고 여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들 모두가 진짜 나인가, 하면 그건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내가 버거울 때는 그 관계를 그만둔 적도 있었고, 혹은 그때의 내가 좋아서 관계를 지속하더라도 언제나 공백은 필요했다. 버겁거나 공백이 필요한 관계 안에서의 내가 어떻게 진짜 나일 수 있을까. 그러니까 모두가 진짜 나라는 건 거짓말이다. 그럼 그래서 가짜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는 게 문제다. 진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짜도 아닌데. 진짜가 아니면 솔직한 게 아닌 걸까. 나는, 아니 그 세계에서의 나는 적어도 솔직은 했는데 말이지. 정리하자면 나는,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는 힘껏 솔직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 가까운 셈이다. 적어놓고 보니 좀 이상한 사람 같지만.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종종 이런 감정일 때가 있다. 따로 떨어진 세계에 있던 관계들이 하나로 묶일 때의 난감함. 내 안에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동시에 만나는 건 상상만 해도 벌써 곤혹스럽다. 혹은 다른 사람과 있을 때의 내가 또 다른 사람에게 탄로 났을 때, 방금 전의 나는 거짓말이고, 이제 될 나 역시 거짓말이지만, 왜 가짜로 구느냐는 (정당하다면 정당할) 추궁 앞에서 그것이 단지 가짜로만 치부되는 건 부당하다고 느끼는 마음의 상태. 나는 그 사람 앞에선 그런 나일 수밖에 없는 걸. 난감한 억울함 같은 것.


내 세계에서 거짓말은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서나 감정 소모를 않기 위해서나 잠시 편하기 위한 것들이 대다수이지만 동시에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 안에서 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기도 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거짓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몇 있을까. ‘한 사람 안에 있는 복수의 세계’는 거의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이기적인 자기 합리화일까.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은희의 하루에 함께 난감해하다가 결국 위안을 얻은 관객들은 그럼 누구일까. 탄로 난다면 난감하겠지만 그렇다고 가짜는 아닐 스스로가 당연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결국, 복수의 세계를 꾸리며 살아가는 게 우리 모두라면, 여기에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우리가 아는 '당신'이란 대체 무엇일까. 나는 당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책 속의 인물들이 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잖아요."

"주인공들이 그렇긴 합니다만, 그게 제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그저 제가 아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이죠."

"저는 부끄러웠어요.

제 자신과 그 안의 인물이 점점 닮아가더니 벼랑으로 떨어지고 땅에 묻히더군요.

정말... 그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 



나는 당신을 안다고, 안다고오오! 지독히도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운철이다. A에게 난감했던 인물이 은희였다면, 나에게는 운철이었다. 이희준 배우가 지닌 능청스러움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는데, 요컨대 이희준 배우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사람을 버틸 수 있었을까, 싶었다.




운철이 재미있어서 자주 웃기도 했지만, 어떨 때는 제발 그만해! 속으로 외치기도 했는데, 운철이 앞에 서있는 사람을 도무지 살피지 않을 때, 그랬다. 이를테면 나에게 운철은 앞에 있는 사람의 다른 세계를 상상해본 적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롤과 그 기분에 취한 사람. 타인의 세계보다 자신의 세계가 너무 커다래서, 내가 아는 당신이 바로 그 당신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 어떤 의미로는, 사람을 벼랑으로 떨어뜨리고 땅에 묻는 그런 사람.




작가 료헤이는 운철과 다른 결의 사람이다. 정말 그 사람들을 알고 있냐고, 기자가 질문을 던져올 때 료헤이는 벙찐다. 시간이 흘러 혼자 남은 료헤이는 가만히 앉아만 있다. 그 질문이 내내 저 자신을 맴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은희와 재회를 하는데, 그때 꺼내는 료헤이의 말은 기자에게 건네지 못한 대답처럼 보인다. 능숙하지 못한 영어로 은희와 떠듬떠듬 대화를 나누다가, 막 떠오른 새로운 이야기를 일본어로 말하는 료헤이. 그의 목소리는 벼랑에 떨어지고 땅에 묻힌 한 인물에게 해피엔딩을 선물한다. 여태 자신의 소설에서, 영문도 모르게 불행을 감당해왔을 인물들에게 전하는, 아마도 작가이었기에 가능한 사과의 선물을.


   




다시 질문이다. 나는 당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게 누군가를 안다는 건 불가능할 일이다. 나조차도 내게 모를 일 투성인데 하물며 다른 사람은. 그러니까 적어도 운철은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것이다. (여태껏 자주 실패했기에 반성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료헤이처럼 해피엔딩이라는 선물을 건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저, 거짓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가짜는 아닐 말을 주고받으며 함께 걷는 사람 정도는 되어야지. 모두의 솔직한 거짓말이 안녕할 수 있도록.  








2018.1.5

혜정.





매거진의 이전글 0.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