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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다정이 Sep 12. 2020

9. 밤의 해변에서 혼자



마음이 쓰이다     


친구들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좋아하거나 마음이 가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 친구 K는 영화 <윈터스 본>의 주인공을 예로 들며, 힘든 일에도 꿋꿋하게 고난을 헤쳐 나가는 이에게 마음이 간다고 했다. 왠지 그 고난을 저 자신이 해결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고. 또 다른 친구 R은 아주 사소한 것에 자뭇 심각해지는 이에게 마음이 간댔다. 야구치 시노부 감독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다른 모두는 그것이 사소하단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지를 못해서, 그 쬐끄만 것에 골몰하는 이에게 마음이 쓰인다고. 나는 놓아버리면 아주 편해진단 걸 알지만 지지부진하게 놓지 못하는 이에게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유난히 마음이 쓰인다는 건 그 사람의 모습에서 저 스스로의 모습―그것이 멋진 모습이든 못난 모습이든 비슷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놓아버리면 아주 없는 게 되지는 않겠지만 결국 무엇도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쉽사리 그걸 못하는 사람이 나이기도 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도 그런 이가 있다. 




다른 나라에서


시작은 영희의 뒷모습이다. 영희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내 카메라가 줌아웃을 하면 영희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보인다. 그곳은 외국이고 곁에는 선배 언니가 있다. 두 사람은 함께 대화를 나눈다. 이곳이 너무 좋다고. 다른 나라에 있는 영희는 내내 말한다. 너무 좋다, 여기서 아예 살아버릴까. 농담처럼 혹은 진담처럼 그렇게 말한다. 그런 영희에게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한국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그녀는 감독인 그와 사랑을 했고 그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전부를 포기하고 외국에 와있다. 토요일에 여섯 시 비행기를 타고 온다는 그의 메일이 있다. 올까, 물어오는 선배에게 오면 오는 거고 안 오면 안 오는 거지. 그녀는 기다리지 않는다 한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지 않는 시간처럼 보이는 시간이 이어진다. 선배와 공원을 걷고, 서점에 들렀다가 암투병 중인 이가 아이들을 위해 작곡했다는 음악을 듣는다. 선배의 지인 집에 방문에 저녁을 먹고 함께 바다에 간다. 느지막이 해가 지는 시간에 영희는 모래사장 위로 한 남자를 그린다. 그를 닮지 않는 남자의 얼굴을 그려놓고 그를 생각한다. 그리고 선배에게 넌지시 묻는다. 나처럼 내 생각할까? 모르겠다는 선배의 말에 그치, 하고 바다를 보던 그녀는 잠깐만, 하며 바다를 향해 걷는다. 그리고는 웬 남자의 어깨에 업힌 채 프레임 변두리로 향하는 그녀, 까지가 다른 나라에서의 영희이다.


그녀가 다른 나라로 향한 건 아마도 한국이 싫어서일 것이다. 한국은 그가 있는 곳이고 그녀와 그 사이의 추문이 퍼져있는 곳이니까. 근심 없이 있을 수 있는 곳은 다른 나라였을 것이다. 그가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살 수 있는 곳. 이별의 후유증이 없는 사람인 척 굴 수 있는 곳. 영희는 다른 나라에서 그걸 꽤 그럴싸하게 해내는 듯하다. 종종 그의 얘기도 나누지만 보통은 주변의 풍경과 낯선 이의 빨간 얼굴 따위의 것을 말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영희는 끝끝내 실패한다. 애초에 실패할 것이기도 했다. 공원을 걷는 영희에게 시간을 묻거나 그저 엄습해오거나 그녀를 들쳐 매고 모래사장을 묵묵히 걷는 정체불명의 사람은 ‘토요일에 그가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가 영희와 내내 함께 있단 사실을 환기하는 듯하다.


언젠가 시나리오를 써본 일이 있다. 전문적으로 쓴 건 아니었지만, 여튼 내용은 이랬다. 유부남과의 연애 사실이 들통난 뒤 이별을 겪고, 그를 잊기 위해서였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잠시 하노이로 떠나 지내는 여자의 이야기였다. 다른 나라를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난, 다른 나라의 공기와 풍경이 한 사람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무엇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풍경 자체가 안기는 위로, 따위의 것이지 않을까. 그가 있는 세상에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을 풍경들―그러니까 그럼에도 밥을 먹고 피아노를 치고 거리를 걸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묘한 위안을 줄 테니까. 자신의 처지와는 도무지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은 얼핏 무심해서 씁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겪은 일을 아무래도 상관없을 일로 만들기도 한다. 다른 나라의 시간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일에 고뇌하는 저 스스로가 농담처럼 느껴지는 나날이었을 것이다. 한편 낯선 풍경 역시 그와의 기억을 먼 일처럼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막연히 상상하며 시나리오의 한 여자를 적어본 일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잊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이란 게 그렇게 훌쩍 되는 게 아니니까. 특히 영희처럼, 그가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와 그와의 기억들이 있는 한 더욱이.




어느새 영화 배경은 강릉이다. 강릉에서 만난 선배가 영희에게 넌지시 물어올 때, 그녀 역시 그 사람 소식은 모른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 토요일. 아마도 남자는 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은 역시 한국이다. 그녀의 소문을 아는 사람들로 많다. 호기심이든 연민이든 그것을 물어온다. 영희 주변으로 사연 있는 여자처럼 성숙해 보인다는 말들이 오고 간다. 술을 마신 영희는 초연하다. 이젠 할 거 다 해본 것 같다고, 죽어도 그냥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영희는 누구를 향한 삿대질 인지도 모를 것을 한다. 이 세상엔 비겁하고 사랑받을 자격 없는 이들 투성이라고. 그리고 그 남자는 더 이상 무엇도 아닌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쿡쿡 찔러오는 세상이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들로 북적했던 잠시는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낮의 해변에서 혼자일 때, 그녀는 영희가 된다. 





(혼자가 된 그녀에게서 자꾸만 마음이 새어 나온다. 영화관에 홀로 있던 그녀의 모습이 그랬고, 혼자서 담배를 피울 때 불렀던 노랫말과 그때의 얼굴. 그리고 화단에 있는 이름 모를 것을 쓰다듬던 그녀의 옆얼굴이 그랬다.)





해변가의 영희는 무엇을 그리다 이내 잠이 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그곳에선 마침 남자가 강릉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의 작품 조연출을 만난 영희는 넌지시 물어본다. ‘어디에 계세요?’ 그리고 영희는 그를 만난다. 잘 살고 있는 듯하다. 그는 ‘정상이 아닌 것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속내가 어떻게든 삐져나오는 영희를 앞에 두고, 술도 마시고 얘기도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물어오는 영희 앞에서 그는 결국 그 일을 후회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영희는 날이 선다.


"후회하세요? 정말 후회하세요?"

"계속 후회해. 매일 같이 후회해. 지긋지긋하게 후회해."

"후회하지 마세요. 후회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계속 후회가 되는 걸 어떡하니. 그렇게 아픈데 계속 후회해야 되는 걸. 누가 좋아서 하냐. … 근데 그것도 자꾸 하다 보면 달콤해져. 그래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 계속 후회하면서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어."  

남자는 곧 책의 한 구절을 읽는다. 그리곤 영희에게 선물한다. 책을 받아 든 영희는 잠깐 담배를 펴고 오겠다며 자리를 뜬다. 그리고,


"괜찮으세요?"


영희는 그렇게 묻는 이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다. 시간은 흘렀고 영희는 그게 꿈이었다는 걸 안다. 영희는 옷자락에 묻은 모래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꾸벅 대답하고는 멀어진다. 뚜벅뚜벅 걷는 영희의 뒷모습은 당분간은 그 자질구레한 마음을 쉽사리 놓지 못한 채 걷고 있을 그녀의 모습을 예감케 한다.   




극 내내 영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나답게 사는 거야."


하지만 무언가를 원한다는 건 도무지 그게 되지를 않아서일 테다. 도무지 되질 않는 마음을 안고 그것을 읊조리는 이의 모습은 그래서 허무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걸 좋아한다. 왜 좋아하는지 구체적으로 이유를 들기는 어렵다. 그저 그런 사람을 볼 때면 명치 부근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라고만 말할 수 있다. 어쩌면 도무지 되질 않는 마음을 안고서 자질구레하게 살아가는 이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놓으면 아주 쉬워진다는 걸 알지만, 쉽게 놓아지지 않으니까 그냥 안고 있는 그런 마음. 지지부진한 이에게 애정을 갖는다는 건 좀 더 지지부진해지는 일이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자질구레하며 지저분해지는 걸까, 생각하면 조금 암담하기까지 하지만… 지지부진한 일상에서 기어코 남아있는, 떨쳐지지 않는 마음들을 한 아름 안고 걷는 이의 뒷모습은 그래도 ‘예쁘다’는 사실. 그 하나가 내게는 분명 위로가 되었다. 달라붙는 기억에 마음이 무거운 이들에게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사랑스럽고 한편으론 고마운 영화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적어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혜정

20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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