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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다정이 Sep 19. 2020

10. 상실과 슬픔의 모양

2018.3.29




감정은 매번 사건 뒤에 온다. 슬프다거나 기쁘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물론 사건 같은 거 없이, 잠에서 깨면 시작되는 ‘하루의 기분’도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기분일 따름이다. 내게 감정은 사건과 함께 오는 것에 가깝다. 감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다루는 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 방식은 곧 그 사람의 모양이기도 하다.




나와 친구 L


나의 경우, 분명 존재하는 어떤 감정을 아예 느끼지 않는 건 어려운 일이다. 감정이 삐죽 대며 튀어나온다. 삐죽 대고 싶지 않아도 표정이나 목소리 억양에서부터 티가 난다. 눈물을 흘리는 일에도 그 역치가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슬플 때도 울고 기쁠 때도 울고 화가 날 때에는 독기가 어린 눈으로 운다. 내가 너무 쉽게 운다라는 걸 진즉에 알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더 알았다. 친구 L과 함께 SF, 로맨스, 스릴러, 액션 등 다양한 영화 장르들을 감상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내 주관대로 매번 울었고 L은 매번 울지를 않았다. 역치에 도달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건 감정에 솔직해지는 일일까. 감정을 쉽게 털어내는 일은 아닐까. 도통 눈물을 흘리지 않는 L을 보며 겸연쩍기도 했다. 나는 눈물을 떨구고는 나를 울게 한 감정과 사건을 금세 까먹었지만 L은 그러지를 않았다. L은 드러내고 풀기보다 껴안고 생각하는 쪽에 가까웠고, 이따금 내가 감정을 드러내며 울 때면 그게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나중에서야 물어오기도 했다. 느낀 것에 바로 순응하기보다 납득하기 위해 분석하는 사람. L은 언젠가는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한 적도 있다. 유독 ‘슬픔’에 무감하다고도 했다. 그 말에 나는, L은 무감하다기보다 이것이 정말 그것인가, 확신할 수 없을 때엔 밖으로 드러내기를 주저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쉽사리 우는 얼굴은 될 수가 없으니, 잠자코 가만히 있는 사람일 거라고.


여러 감정들 중에서도 유독 슬픔을 말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영화가 <데몰리션>이기 때문이다. <데몰리션>은 숱한 감정들 중에서도 상실로 비롯된 슬픔에 천착하는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 데이비스는 굳이 따지자면 나보다는 L에 가까운 사람이다. 사건 뒤에 도착하는 감정이 벌써 도착했는지도 몰라서 이것이 정말 그것인가, 납득이 될 때까지 해부하고 분석하는 사람.


데이비스




데몰리션


차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했다. 아내가 죽었다. 살아남은 데이비스에게 분명한 사실은 그런데 지금 슬프지 않다는 것이다.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데이비스는 인상을 찌푸려도 보지만 그럼에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커다란 상실을 겪은 이들 모두가 슬퍼하는데 나는 왜 슬프지 않은가. 상실의 경험은 데이비스를 난처하게 한다. 아내가 죽었지만 슬프지 않은 스스로가 이상한 데이비스는 편지를 쓴다. 아내가 죽은 그날, 돈만 삼키고 초콜릿을 내어주지 않은 병원 자판기가 있었다. 그 고객센터를 향해 적는, 정당하다면 정당할 항의 메일이다. 내용은 어째 항의보다 상담에 가깝다. "너무나 배가 고팠기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제 아내가 10분 전에 죽었고요. 당신네 탓이란 건 아닙니다. 제 클레임을 드라마틱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고요. 그냥 확실하게 설명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아내가 죽은 일과 아내가 죽기 전에는 어땠는지, 죽은 후의 상황은 또 어쩌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확실하게 설명하는 데이비스의 편지가 고객센터 직원 캐런에게 닿는다. 그사이 데이비스에겐 이런 일도 있었다. 데이비스가 어쩌다 전철 옆좌석에 앉은 이에게 제 삶을 토로했을 때.


“전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슬프게도…… 그녀가 죽었는데 괴롭거나 속상하지도 않아요.”

“그럼 어떤데요?”


그 질문에 데이비스는 얼른 일어나 전철을 세워버린다. 위급상황이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찰들은 ‘얼마 전 아내를 잃은’ 상황을 참착해 그를 풀어주지만, 그건 ‘얼마 전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슬프지 않다면 대체 어떤데요’하고 대뜸 습격해온 질문으로 생긴 일이다. 그때 휘청대며 급정거하던 전철처럼, 이후 데이비스의 삶도 급정거된다. 데비이스는 스스로에게 골몰한다. 이건, 편지를 받은 고객센터 직원 캐런이 “이야기할 상대는 있어요?”하고 질문해온 덕이기도 하다. 이 질문을 시작으로 데이비스와 캐런은 묘한 동지적 관계를 맺는다.  



캐런과 캐런의 아들, 크리스


캐런은 지금 하는 사랑에 확신도 없다. 아들이 있는데 한창 사춘기인지 삐죽 대기 일쑤다. 그 모두가 스트레스라서, 캐런은 몰래 화장실에서 대마를 피우곤 한다. 크리스는 자신의 성 정체성이 혼란스럽다. 그들과 데이비스는 만난다. 삶 혹은 지금 감정이 이대로가 맞는지, 도통 확신할 수가 없어 질문만 남은 사람들이 부유하다 서로를 만나 천천히 스스로를 인식해간다. 이 인식에는 각 인물들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도 있지만, 더 눈에 띄는 건 데이비스가 답을 찾기 위해 몰두하는 행위이다.


데이비스는 전부를 부순다.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이건 왜 이렇게 작동하는지, 저건 왜 또 삐걱거리며 소리를 내는지. 모르겠거나 눈에 거슬리는 건 일단 다 부수고 본다. ‘무언가를 고치기 위해서는 일단 전부를 분해한 다음, 뭐가 중요한지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행위는 곧 아내와 함께 살았던 집―매일이 무탈하지 않았지만 그는 무탈하다고만 생각했던, 그 집을 부순다. 온몸으로 기억을 더듬는, 혹은 부수는 일이다. 애초에 데이비스와 아내 사이에는 소중히 간직할만한 기억이 몇 없다. 데비이스가 가구를 부술수록 마주한 건 빈약했던 서로 간의 추억이었는지도 모른다. 웅장해 보이지만 금방이라도 조각날 것처럼 위태로운 집―그의 집 벽면은 온통 유리로 되어있었다.


데이비스가 진정 모르겠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서, 그런 행위는 자신에게로도 향한다. 방탄복을 입은 데이비스가 캐런의 아들에게 총을 쥐어주고 자신을 쏴보라 말하는 일. 영화 내내 데이비스는 그런 직접적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무감한 스스로가 납득이 되지 않을 때, 고통은 도리어 그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방탄복을 입은 채로 맞아본 총탄 같은, 죽지는 않을 테지만 죽을 만큼 아플 것. 그만큼의 고통이 필요하거나, 혹은 이미 그만큼의 고통이 있지만 겪고 있는지를 몰라서, 데이비스는 저 스스로에게 고통을 안긴다.




그런 분해 작업 끝에, 데이비스는 어떤 진실을 발견한다. 아내가 임신을 했고, 그런데 그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음을. 삐걱거렸던 그와 그녀 사이를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이자, 그녀를 돌봐온 다른 사람이 있었다. 데이비스는 아내의 무덤에 찾아온 남자가 내연남인 줄 알고는 이렇게 말한다. “줄리아를 아껴주셨기를 바라요. 그녀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비로소 데이비스는 그녀와 자신 사이에 무엇이 부재했는지를 정확히 안다. 서로를 아끼는 일.


데이비스는 엉망진창으로 몸이 망가진 크리스와, 그런 크리스를 성심껏 보살피는 캐런을 본 적이 있다. 캐런은 크리스에게 “나는 네가 숨김없이 당당하길 바라. 엄마가 더 잘할게. 약속해. 깨어나면 아주 혼날 줄 알아.”하고 말하는 것도 보았다. 서로를 아끼는 일. 이제 그의 손에는 “바쁜 척만 하지 말고 나 좀 고쳐줘요.” 아내의 글씨체가 적힌 포스트잇이 있다. 그제야 데이비스는 고개를 숙이고서 소리 내어 운다. 그는 진즉에 슬펐고, 이제 왜 슬픈지를 알아서


그리고 마지막이다.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했던 아내를, 사랑했지만 사랑하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한 데이비스는 아내가 남긴 보험금을 아끼는 일과 사랑하는 일에 쓴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 되어 아이들과 함께 달리고, 말미에 몸을 붕 띄운다. 과거에 얽매여 있던 이가 과거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이다.   





슬픔의 모양


<데몰리션>을 보면서 나는 슬픔을 드러내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이를테면, 기쁨을 드러내는 일과 슬픔을 드러내는 일 중에 더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 후자이지 않을까. 왜냐하면 드러나는 모양과 농도가 천차만별이었던 건 기쁨보다는 슬픔이었으니까. 천차만별이라는 건 그만큼 더 어려운 감정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감정은 하나의 모양을 하고 일직선으로 오지 않는다. 특히 슬픔은. 그 사실이 너무 난처했던 적이 있다. 스무 살 때였다. 8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외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리 가족은 밤늦게 외가가 있는 대구로 향했다. 엄마의 얼굴은 잠잠하고 조용했다. 아빠는 화 비슷한 모양으로 슬픔을 드러냈다. 소리가 좀 컸고, 몸짓도 평소보다 격앙되었다. 지난 8년간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에 기인한 죄책감. 그게 아빠, 그리고 나를 옭아맸다. 8년이라는 짧지 않은 공백에 내 책임이 아주 없지는 않았기에. (부모님께서 농아인이어서, 바깥과의 연락에는 내가 필요했다.) 혹은 그 공백의 전부가 내 책임일 수도 있었기에, 나는 잠자코 눈치만 보다가 혼자일 때 울었다. 그런데 엄마는 무감했다.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무너졌을 거라 짐작은 하지만, 내 시선 안의 그녀는 조금 기운이 없는 채로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그게 너무 무서워서, 나는 엄마를 자주 훔쳐보았다. 왜 울지 않지. 차라리 울었으면. 차라리 그랬으면. 그런 마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아빠를 미워하기도 했다. 조문객 앞에서 내보이는 그의 슬픔, 그 모양이 너무 크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게 싫었다. 정작 슬퍼해야 할 엄마는 저렇게 있는데 아빠가 왜? 내가 뭐라고 그걸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런데 그 시절엔 그런 마음을 품고서 타인의 방식을 내 마음대로 재단했다. 내가 아는 방식에 부합하지 않으면 슬프지 않지만 애써 슬픈 척하는 위선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거나, 분명 슬플 텐데도 무섭고 미련하게 제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몰랐던 거다. 사람마다 슬픔의 모양이 다르다는 걸. 데이비스가 그랬듯 ‘슬프지 않다’는 방식일 수도, 반대로 어떤 격앙된 행위로 토로해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전혀 상상하지 못한 나는 그렇게 어리고 유치했다.


외할머니 장례식이 끝나고 조금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상실이 남은 이들에게 미치는 파장과, 그 파장을 받아들이고 토해내는 일이 서로 간에 다른 모양일 수도 있다는 거. 그들 각자는 자기 나름의 모양으로 고투해가며 앞으로 나아갈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거. (할머니의 영정사진은 부모님의 집, 안방 장롱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고 종종 그것은 거기에 아주 없는 것처럼, 부모님은 지금 가능할 기쁨과 슬픔과 화를 도모하며 산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부고 이후, 둘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새로이 생겼다는 것을 짐작한다.)


갑자기 사적인 얘기를 길게 꺼내 놓았는데, 어쨌든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다. 감정은 매번 사건보다 늦게 온다. 어떤 감정을 자각하더라도 그건 언제나 상실 이후라는 점에서 비극이겠다. 그리고 상실의 경험이 무언가를 반추하게 하고,  몰랐거나 모른  해온 것을 알게 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소중한  이미 사라졌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래서 상실 이후에 오는 것들인간적이고 따뜻하기도 하다. 각자가 다른 모양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이. 어쨌든 각자는 고투를 하는 것이다. 상실 이후 삐걱대는 감정을 모른 척하지 않고, 납득하기 위해 골몰하거나, 무언가를 부시거나, 눈물을 토해내거나, 잠잠히 가만히 있거나. 사람들이 고투하는 모양이 이다지도 다를  있다는  까먹고 싶지 않을 , 나는 영화 우리 가족과 영화 <데몰리션> 친구 L 생각한다.  








혜정.

2018.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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