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짧은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이상한 코치님, 이상한 바바리맨, 이상한 지하철 남자를 만난 여성이 달리고 달리다가 결국 죽고, 자기 인생 나름의 분기점들을 넋두리하듯 늘어놓는 소설이었다. 지인은 그 소설을 읽더니, 너는 달리기에 관한 글을 꽤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달리기가 네 인생에서 꽤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는 것 같다고. 그랬던가, 달리기를 대놓고 쓴 이야기는 그 소설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싶다가도 나는 다시금 그런가, 생각했다. 달리기가 내 인생에서 하나의 방점이라는 데에 다소 수긍이 갔기 때문이었다. 더 정확히는 달리기보다는 육상부라는 게 그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육상부를 했다. 방과 후에 한번 해보자는 친구의 말에 솔깃해서 들어간 육상부였다. 내 머리는 어느새 남자아이처럼 짧아졌다. 코치님의 권유였다. 짧은 머리로 공설운동장을 수없이 돌았다. 육상부에 있는 내 또래, 언니, 중학교 선배들도 모두 머리가 짧았다. 나름 운동하는 학생의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어쩐지 지금에 와서는 이상하다.
육상부를 하는 내내 수업은 도통 듣지 않았다. 훈련을 한다는 이유로 자주 그랬다. 들어도 모를 말들이니까. 내 영어가 지금에 와서 도통 이런 상태인 데에는 육상부 책임이 크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마도 그 이유가 아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육상부를 1년 동안 했다. 1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종목은 바뀌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내 종목은 3번이나 바뀌었다. 처음에는 단거리였다가, 어느새 중거리가 되었고, 말미에는 멀리뛰기가 되었다.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유달리 종목이 바뀌었다는 게 너무 '나'라는 사람 같아서 부끄러울 때가 있다. 그 정도가 나였구나, 하는 마음 같은 것. 육상부를 하는 내내 그런 마음은 자주 일었다. 특히 시합을 할 때 그랬다.
800m 달리기 시합을 하면 선수마다 출발지점이 달랐다. 1번 트랙부터 8번 트랙까지, 선수들은 자기 자리에 서서 출발 준비를 했다. 곡선의 길이를 고려한 배치일 것이다. 나는 종종 7번이나 8번 트랙에 섰다. 결승점까지 뛰어야 하는 객관적 거리는 같더라도, 출발지점에서 나는 거의 맨 앞이었다. 출발 신호가 들리면 모두가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나는 계속 따라잡히기만 했다. 맨 앞을 고수했던 적이 없었다. 나와 가장 멀리 있던 1번 트랙 선수까지 나를 제칠 때. 출발점이 아무 소용없어서 더 무섭다는 게 이런 걸까. 트랙 바깥에서 팔을 더 흔들어야지, 무릎을 더 올려야지, 나를 향해 외치던 감독님의 목소리가 들릴 때. 그럴수록 팔다리는 더 무거워질 때. 나는 육상부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결승점에 다다르면 결과는 숫자로 환산됐다. 1등부터 꼴찌까지. 또는 기록에서 또 다른 기록으로까지. 내가 숫자로 환산되는 게 무서워서, 숫자는 너무 명백하니까, 달리기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없다면 없는 대로. 어느새 나는 1등이나 새로운 기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육상부니까 그냥 육상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애초에 승부욕이랄 것도 없었다.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육상부에 승부욕은 어쩐지 겸연쩍으니까. 모든 것을 대강했기 때문에, 그래서 진실로 나에게 재능이 없었나? 확인할 길은 없다. 고로 재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재능이 없었다.
육상부의 세계에서 나는 재능과 숫자에 익숙해졌다. 익숙해졌다는 건 그걸 인정했다는 뜻이다. 이겨낼 재간이 없다고. 그런 생각은 지금도 사실 똑같다. 그런데 어딘가 불편하게 걸리는 사람이 있다. 이름은 지용이. 육상부를 그만둔 지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이름이 선명하게 기억난다는 건 그만큼 인상적인 인물이었다는 뜻이겠다. 지용이는 함께 육상부를 하는 친구였다. 공부를 잘했는데 어쩌다 육상부를 하게 되었지. 그 과정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지용이의 부모님은 지용이의 육상부 생활을 탐탁지 않아하셨다는 것이다. 반면 지용이는 육상부에 열심이었다. 종목은 투포환이었고, 살면서 투포환을 던져볼 일이랄 게 없으니까, 지용이는 육상부에서 처음으로 그 묵직한 쇠구슬을 던져본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지용이는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용이는 거기에 딱히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지용이는 그냥 계속했다. 코치님이 하라고 하는 훈련을 계속하고 또 했다. 맨손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볼 옆에 대고서는 몸을 수그리고, 왼 다리를 하나 둘 셋 움직이다가 오른 다리를 뒤로 이동해서는 휙, 하고 몸을 돌려 팔을 뻗었다. 무거운 거를 하나도 들지 않고 맨몸으로 하는 훈련이었는데 지용이는 몇 분 만에 땀범벅이 되곤 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지지부진하게 느껴질 시간 동안 지용이는 미련하고 정직하게 훈련을 했다. 지용이는 투포환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나서, 육상부가 없어지기 전 마지막 강원도 체전에서 1등을 했다. 다른 부 시합에 출전한 중학교 언니야보다 더 멀리 던진 기록이었다. 경기장에 있던 고등부 코치들은 지용이를 스카웃하려 들었다. 곧 졸업하니? 우리 중학교에 입학하지 않을래.
육상부의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코치님은 나에게 말했다. "혜정이도 열심히 했는데, 혜정이만 메달이 없네."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할 말이 없는 그 문장이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한다 보아도 무방한데, 어쨌든 나는 육상부에서 지용이를 만났다. 내가 지용이 같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지용이가 땀을 뻘뻘 흘리던 그 훈련, 그 장면이 나를 때린다고 해야 하나. 출발점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건 아마도 저런 걸 두고 하는 말이어야겠지. 8번 트랙 따위가 아니라.
육상부가 없어지고 지용이는 춘천으로 전학을 갔다. 그곳에서는 아마도 공부를 했을 것이다.
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