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 육아
길을 걷다가 바닥에 깨진 유리 조각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었다. 내 아이가 다니는 길인데, 오며 가며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게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이 넓은 길에, 수많은 아이 중에 설마 내 아이가 다칠까..? 모르는 일이지.
여름에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그 안에 있는 모기를 잡지 못하면 꼭 집에서 아이들이 모기에 물렸다. 엘리베이터의 그 모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찜찜해서 그 후로 엘리베이터 모기는 신발을 벗어서라도 꼭 때려잡아야 마음이 편했다.
외식을 할 때 아이들은 기분이 좋아 목소리도 커지고, 언제나처럼 음식을 잘 흘린다. 아이들의 음식을 챙겨주고 나도 좀 먹으려 하면 벌써 배가 부르다며 지루해 엉덩이를 들썩인다. "엄마 밥 먹게 좀만 기다려줘.", "조용히 얘기하자."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아이들을 단속하며 먹은 듯 만 듯 후루룩 끝나는 외식이지만, 떠난 자리가 아름답도록 식탁과 바닥에 아이가 흘린 것까지 치우고 일어선다. 아이가 있으니 지저분해도 그러려니 하는 당연한 이해를 구하지 않고, 아이가 있어 더 깔끔하게 하고 나오려고 신경을 쓴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도 지나가는 차가 없어도 건널목의 신호를 잘 지키려 하고, 아이와 함께 있지 않아도 스스로 떳떳하고 싶어 세상의 규칙들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아이들은 다 보고 있다. 아이와 함께 신호를 기다릴 때, 빨간 불인데 다른 어른이 그냥 건너는 걸 보면 아이는 내게 살짝 얘기한다. "엄마, 빨간 불인데, 가면 안 되는데..", "응, 맞아. 빨간 불에는 가면 안 되지"
반대로 내가 혼자 길을 건널 때 아이의 친구들이 나를 볼 수도 있는데 나는 아이의 눈에 그런 어른으로 비치고 싶지는 않다.
놀이터에는 아장아장 걷는 아가들부터 초등 고학년까지 연령이 다양하다. 어린 동생들을 배려하며 놀아주는 아이들도 있고, 거칠게 누비며 노는 아이들도 있다. 요즘은 미끄럼틀이 워터파크처럼 원통형으로 되어있는 것도 많은데, 초등 고학년 아이들은 그 위를 올라 등반을 하며 마치 동물의 세계처럼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 같다. 그 아이들이 떨어져 다칠까도 불안 불안하고, 어린아이들이 보고 따라 하니 그 또한 경계되어 나는 또 외친다. "얘들아, 내려와아— 위험해— "
오지랖 넓은 아줌마가 무슨 참견인가 싶겠지만은 다치는 건 순간이다. 돌이킬 수 없기에 남의 아이라도 잔소리가 나온다.
난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은 아니다. 모든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내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대하는 게 어려웠고, 어떤 표정으로 웃어줘야 할지 몰라 눈을 마주치는 것도 불편했었다. 여전히 그리 편하지만은 않지만,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니 마치 다른 각도에서 보듯 '모두가 누군가의 아이'라는 시각이 생겼다.
만에 하나라는 그 눈곱만큼의 확률에 내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과민할지도 모르는 그 걱정으로 했던 작은 행동이 다른 아이들도 좀 더 안전하게 하고, 나와 비슷한 생각의 누군가의 배려로 내 아이도 한 걸음 더 안전한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좀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 이미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배려와 기적 속에 오늘도 살고 있는지 모른다.
아이 옆에 언제까지나 붙어있을 수 없으니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수백 번의 잔소리보다 나의 삶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아이가 살아가는 내일의 모습이 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보이는 그 한 번을 그냥 넘길 수가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