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그루 Nov 24. 2024

엄마, 우리 내년에도 절임배추 할까?

절임배추를 때려 치우고 싶은 세 가지 이유

내가 중3때부터 했으니 올해로 18년차다. 사람으로 치면 수험생 준비를 해야 하는 나이다. 그 만큼 오래된 것이다. 우리 가족과 절임배추의 인연은.


27년 전, 쫓기듯 진도로 내려와 20년 전 또 쫓기듯 농사를 시작한 우리 부모님에게 절임배추는 위기를 기회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준 고마운 존재다.


남들은 배추를 못 팔아서 걱정인데, 우리는 '팔까, 말까' 배부른 걱정을 하고 있다. '말까'를 매번, 매년 얘기하면서도 결국 '팔자'가 된 지 18년째다.


올해도 18번 째 '말자'를 외쳤다. 내년에는 정말 절임배추 하지 말자, 올해가 진짜 진짜 진짜 최종 마지막이다.




우리 가족에게 한 줄기 빛을 안겨준 이 고마운 절임배추를 그토록 '경멸'하게 된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택배가 제 날, 안전한 상태로 도착할지에 대한 초조함, 불안함, 압박감이 엄청나다. 얼마나 엄청나냐면 그걸 걱정하느라 엄마와 나는 몸까지 아픈 지경이다.


절임배추는 '김장하기 전 날' 꼭 도착해야 하는데, 전국적으로 절임배추 물량이 쏟아지는 시즌이다 보니 꼭 몇 건씩 대형사고가 터진다. 도착을 안 하거나(심지어 기사님이 잠수를 타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거나, 엉망진창 찢어지고 터져서 도착하거나.


차라리 김치 완전체를 보내는 것은 스트레스가 없는 편이다. 터지면 다시 보내드리면 그만이지만, 절임배추 택배사고는 오만 욕들과 '양념값까지 다 물어내라' 라는 협박으로도 이어진다.


두 번째는 배추다. 해가 갈수록 배추 농사를 짓기 어려워지고 있다. 보통 '김장배추'는 8월에 씨를 뿌려 9월에 밭에 심어준다. 그런데 씨를 뿌려야 하는 8월은 극심하게 뜨거워 모종상태로 녹아버리고, 아기배추 모종들을 심어줘야 하는 9월은 연달아 태풍이 쳐들어온다.


이러다 말겠지, 내년에는 안 그러겠지 한지 10년이 가까워진다. 폭염과 폭우는 해가 갈수록 그 정도가 깊어진다. 농사를 짓지 말라는 소리다.


겨우겨우 배추를 심어도 죽기 마련, 겨우겨우 살아남은 배추들도 멀쩡한 것 같은데 속을 갈라보면 뿌리가 돌아 상했거나 절여서 보냈을 때 맛이 가버린다.


세 번째는 사람이다. 우리가 아무리 우주최강 가족농부라고 한들, 절임배추는 절대 우리 넷으로만 운영할 수 없다. 밭에서 배추를 해오는 팀, 배추를 절이는 팀, 배추를 다듬고 씻는 팀, 배추를 포장해서 택배마무리 하는 팀. 팀 단위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갈수록 사람을 구하는게 어렵다. 전에는 동네 어머님들이 도와주셨는데, 그 분들은 이제 걸어다니기도 힘들다. 게다가 절임배추가 워낙 '고강도 작업'이라는 소문(?)이 돌아서 선뜻 온다는 사람이 없다.


겨우겨우 일용직분들을 모셔도 가르치는데 한 나절이다. 배추 속잎까지 꼼꼼히 씻어내야 하고, 배추를 쌓을 때는 다치지 않게 어떤 각도로 놓아야 하며, 염수를 만들 때는 어떤 과정과 농도로... 등등... 하긴 나도 아직 헷갈리는데 처음 오신 분들은 어떻겠냐고.


우리가 1년 내내 모실 수 있는게 아니라 절임배추 딱 한 철만 모실 수 있다보니 더더욱 사람을 구하는 것이 어렵다. (게다가 인건비와 식비는 왜 그리 오르는지. 내 인건비는 누가 주는 거야)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18년째 똑같이 '내년에는 절대'를 외쳐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18년 동안이나 절임배추를 보내왔던 가장 큰 이유는 딱 하나이다. (이제는 그 이유가 '돈'이 아닐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반드시 우리 절임배추여야 하는 고객님들이 계시니까.


올해는 정말 배추를 심고 나서도 절임배추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왜 아직도 절임배추 소식이 없냐"고 물어보시는 분들께 약간은 쌀쌀맞게 절임배추를 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실제로 배추도 많이 죽어버렸고, 사람 구하는 것도 어렵고, 무엇보다 우리 가족들(특히 엄마)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이를 악 물고 절임배추 주문을 받았다.


심지어 이렇게 역대급으로 배추값이 비싸다고 연일 뉴스에서 오두방정을 치는데, 우리는 가격인상을 하지 않았다. 작년과 같은 금액으로 예약을 받았다. 18년의 정이 무섭다.


18년이 끝이야. 올해가 마지막이야. 하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가 먼저 우리 가족들에게 확언을 했다. 내년에는 절임배추 안 할거니까 그렇게들 알라고.


그렇게 병원에서 받은 약을 먹어가며 겨우 첫 주를 버텼다. 그런데 이게 왠일.


잘 받았다고, 덕분에 김장 잘 했다고, 내년에도 잘 부탁한다는 뜨끈뜨끈한 후기들이 속속들이 도착한다. 내년에도 잘 부탁한다는 말씀에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까. 내년은 없어요. 내년에는 정말 못 할 것 같아요. 택배는 둘째치고 날씨가 무서워요. 배추농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 전에 우리 가족들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 이해좀 해주세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귀한 김장재료를 믿고 맡겨주셔서, 매년 찾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씩씩하게 말씀드렸다.


그렇게 수십 분께 씩씩한 말씀을 드리고 나니, 내 마음도 씩씩해진 것 같다. 오늘 아침 엄마에게 슬그머니 말했다. 우리 내년에도 절임배추 할까?




배추를 못 팔아서, 3년을 연달아 배추밭을 갈아 엎어서 울던 때를 기억하자.


우리를 찾아주시는 한 분 한 분께 오만한 쌀쌀함 대신 감사함만 가득 전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