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를 사랑하는 영국의 애니메이션
미국에 디즈니, 일본에 지브리가 있다면 영국에는 아드만 스튜디오가 있다. 디즈니나 지브리에 비해 기업의 유명세는 덜 하지만 월레스와 그로밋이라는 애니메이션만큼은 두 대기업에 뒤지지않는다고 생각한다. 월레스라는 남자가 애완견 그로밋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스토리인데, 클레이로 만든 캐릭터가 눈을 깜빡이고 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든 빠져들어 보게된다. 특히, 월레스와 그로밋이 달에 착륙해 달치즈를 크래커에 발라먹는 장면은 90년대 생이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손으로 그려내고 컴퓨터로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이었다면 이 씬이 그렇게 와닿진 않았겠지만, 클레이캐릭터가 달 위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실제 달은 정말 치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려서 볼 땐 잘 못 느꼈는데 피크닉하면서 머그잔에 차를 마시고, 정장바지에 베스트를 입은 월레스의 모습은 영국 그자체다. 일본이나 영국이나 컨텐츠 속에 자기문화 녹이는건 정말 잘한다..
가장 최근에 봤던 아드만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은 숀더쉽 더 무비 : 꼬마외계인 룰라(A Shaun the sheep movie : Farmageddon) 인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외계생명체가 지구에 불시착하며 생기는 에피소드를 다룬 영화다. 주제나 스토리는 사실 흔한데 캐릭터들이 귀여웠고, 대사 하나없어도 물흐르듯 흘러가는 영화에 빠져들어서 봤다. 90년대에 개봉했던 영화들에 비해 더욱 정교하고 깔끔해졌으며 스톱모션의 기술이 발전해서 그런지 시각적인 즐거움도 더 해졌다. 군데군데 지문자국이 남아있던 투박함은 사라졌지만, 외계인이 초능력으로 날아다니는 장면같은 다양한 상황을 자연스럽게 연출해 영화가 더 재미있어졌다. 특히 그로밋의 도움을 받던 숀이 반대로 외계인 룰라를 도와주는 역할로 등장하는데, 월레스와 그로밋 양털도둑편을 본 사람이라면 의젓해진 숀의 모습에 놀라게될 것이다. 주인공인 숀은 월레스와 그로밋 양털도둑편에서 사시나무떨듯 떨면서 도망다니는 모습이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영리하고 주체성있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숀은 여전히 엉뚱하고 사랑스러워서 보는 내내 미소를 짓게 된다.
찰흙을 일일히 움직여 만드는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면서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는 아드만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기술의 힘을 빌리는 것보다 전통적인 수작업을 선호하는 가장 영국스러운 영국영화라고 생각한다. 대중성이나 상품성보다는 작품성에 초점을 두어서 그런지 과거에 비해 크게 흥행한 작품이 없지만, 특유의 감성은 화려한 기술의 애니메이션에선 느낄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요새 레트로가 유행하며 2030세대에선 월레스와 그로밋이 굉장히 인기인데, 아드만 스튜디오에서 성인타겟의 괜찮은 애니메이션 하나 제작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