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비버와 키위 그리고 캥거루에 대한 이야기
올 초에 5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두었다.
다니던 회사 전에 동종 업계에서 일했던 경력까지 합하면 8년 가까이 해온 일에서 떨어져 나왔다. 다른 걸 좀 배워볼까 하는 나름의 계획이 있긴 했지만 엄청나게 거창한 건 아니었다.
일을 그만둔 건 계속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작년에 승진도 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름 인정도 받았으며, 스스로도 잘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계속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 계속할 자신이 없어진 지가 꽤 됐던 것 같다. 반쯤은 그래도 잘해가고 있다는 다독임으로, 나머지 반은 달리 먹고살 방도가 없지 않냐는 협박으로 작년까지 버텼다. 그렇게 긴장에 긴장을 거듭하며 팽팽해진 신경줄이 올 초에 팅! 하는 귀여우면서도 무서운 소리를 내며 끊어져버렸다.
갈 때가 됐으면 가야지. 일을 그만둔다는 의사를 회사에 전했다. 퇴직금이 있으니 당분간 굶진 않겠지. 친구랑 얘기한 대로 뭐를 배우든, 아니면 하다못해 여행이라도 맘 편하게 해 보자고 다짐했다. 언제 또 이렇게 놀아보겠나. 지금이야말로 나의 기회다! 그동안 가지 못한 장기 여행을 떠날 기회!
회사를 그만둔 지 꼭 3개월이 지났다.
3개월 간 집에만 있었다. 지금도 집에 있다. 이 글도 집에서 쓰고 있다. 미래의 계획과 경제적 자립에 굉장히 집착하기 때문에 그만두기 전에 나름 올해의 계획과 그에 합당한 비용을 원단위까지 계산해두었는데. 친구와 배우기로 한 과정은 코로나19로 무기한 중단되었고, 이 상황에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꿀 일이 되었다. 아놔.
그러다 지난달에, 정확히 말하자면 선거날 아침에, 그동안의 모든 사진과 여행 기록과 대학 노트와 자료와 이력서와... 그야말로 나의 모든 자료가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무방할 단 하나의 저장공간이 폭발했다. 아, 아니다 그냥 조용히 사망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큰 맘먹고 산 3TB짜리 외장하드가 아주 작고 가냘픈 틱, 틱, 틱 소리를 내며 인식이 되지 않더니 조용히 사망했다.
그동안 여행기 쓴다 쓴다 하고 안 썼다. 그동안 인스타나 다른 플랫폼에 사진이라도 올린다 올린다 하고 안 올렸다. 누구한테 꼭 보여주려고 쓰는 여행기도 아니고 찍은 사진도 아니었지만, 모든 게 이렇게 허망하게 날아가다니. 기억과 기록은 결을 같이 한다고 믿는 나는 이유도 모를 억울함에 방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며 눈물을 흘렸다.
부랴부랴 인터넷으로 복구 업체를 찾아 한달음에 달려갔다. 업체 말로는 손상이 워낙 심해서 복구가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다. 작업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 최대한 복구만 해달라고 요청하고 2주가 지났다. 이번 주에 드디어 복구된 자료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엉망진창으로 뒤섞여버린 수만 장의 사진과 동영상이 이름도 이상한 폴더 여러 개에 들어가 있었다. 열어보니 나의 10여 년이 비빔밥처럼 잘 비벼져 있었다. 기가 막힌 맛집에서 사 온 비빔밥의 밥알과 나물을 하나하나 떼어 재료를 파악하는 초보 요리사의 심정으로 사진 정리를 시작했다. 이틀간 하루 종일 붙잡고 정리했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한 폴더 안에 쌓인 47,894개의 사진이 여전히 분류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과 기록에 집착하고 잃어버리지 않게 저장하는 일에 혈안이 돼있었는데,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할 줄만 알았지 생각만큼 자주 꺼내보지는 않았다. 시간을 들여 꼼꼼히 보지도 않았다. 어디를 가면 풍경이 어떤지 둘러보는 일보다 먼저 카메라를 꺼내 들기 바빴는데, 그렇게 찍은 결과물은 파일로만 남아 저장되었다. 이런 게 시간낭비, 자원낭비가 아니면 뭐가 낭비란 말인가.
그래서 이제 오래도록 미뤄온 일을 하려고 한다. 계획이고 뭐고 다 틀어지고 어디 가지도 못하는 마당에, 인생의 공백기에도 미루고 미룬 일을 하지 않으면 이 일은 영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디에든 올릴 사진은 올리고 쓸 여행기는 쓴다. 얼마나 오래되었든지 간에.
이건 아주 오래된 여행 이야기다. 이제부터 올릴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소도 사람들도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없거나 그 모습이 아니다. 사진에 등장한 식당이 맛있어 보인다고 해도 찾으려고 하진 마시길.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사장이 바뀌어도 몇 번이나 바뀌어 그 맛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사망한 외장하드에서 겨우 건저 낸 75% 복구율의 사진과 동영상, 그리고 그보다도 못한 기억을 이어 붙인 이야기다.
10년도 더 전의 캐나다와 뉴질랜드 그리고 호주.
그 시절 비버와 키위 그리고 캥거루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