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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과 도착, 그 사이 캥거루

3월 셋째 주 캥거루 이야기

by 아델리


워홀러의 천국, 호주.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워킹홀리데이로 떠난 여행의 종착점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처음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을 때, 캐나다 비자가 나오지 않으면 호주 비자를 받을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영어권 국가 중에서 인원 제한이 없이 상시 모집하는 나라는 호주 뿐이었으니까. 드넓은 땅덩어리에 인구가 적은 호주는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관대하게 비자를 준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호주에서 이 모든 여정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캐나다뉴질랜드 호주 순이 아니라,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혹은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순이 될 수도 있었다. 뭐, 지금 와서 순서가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호주에서 워홀 생활을 시작했다면, 호주가 시작인 동시에 끝이 되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을 뿐.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떠나기 직전에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다. 뉴질랜드까지 갔으니 옆에 있는 호주까지 둘러보고 와야지, 이런 야무진 계획을 한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혹시 모르니까' 정도의 대비책이었다.


3월에 북섬의 오클랜드에서 시작한 뉴질랜드 생활은 다음 해 3월 남섬의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끝났다. 비자가 만료될 즈음에 가서는 모든 의욕이 없는 상태였다. 1년 가까이 같이 지내던 친구들이 모두 귀국하고 홀로 남아 불안감과 외로움에 쩔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가 마음 편하게 길을 걷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뭐가 됐든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도 일단 호주에 가기로 했다. 집에 돌아가더라도 호주에 가서 하기로 했다. 왜냐면 '혹시 몰라서' 받아온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아까워서. 이게 아이러니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루 밤을 꼬박 새우고 잔뜩 날이 선 상태로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 후 반쯤 졸다가 내린 후엔 롤러코스터의 연속이었다. 시드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도시였다.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공항을 벗어났다. 시내로 들어가는 셔틀버스를 탔는데, 내가 내릴 곳이 거의 종점이라 시내 구경을 버스 안에서 다 해버렸다.


사람들이 내릴수록 길에 차가 점점 많아졌다. 거리를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여기가 정말 내가 머물고 싶은 곳이 맞는 걸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호스텔에 내려 체크인을 하고 같은 방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씩씩한 척을 좀 한 후에 함께 나와서 도시를 걸었다. 느긋하려고 애써봤지만 소용없었다. 크고 붐비는 도시. 한국을 떠난 지 오래돼서 그런가. 서울보다 더 정신없게 느껴졌다.



이후 시드니에서 6개월 정도 보내면서 이 도시에서도 느긋하게 지내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지만, 초반에는 정신이 쏙 빠질 정도로 주의를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산만함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햇살이 쨍쨍한 시드니에는 구경할 것도 많고, 갈 곳도 무궁무진했다.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주말 마켓도 가고 식물원도 가고 싸고 맛있다는 스테이크도 먹으러 갔다.


뉴질랜드에서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한동안 한국 사람은 구경도 못하고 지냈다. 호주로 넘어오면서 킹스크로스에 있는 한인 호스텔에 묵게 된 것은 순전히 싼 가격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은 방 가득 이층 침대가 들어간 곳에서 한국 사람들과 어울려 모국어로 맘껏 수다를 떨고 라면을 끓여먹고 소주를 마시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몇 달 동안 나를 괴롭힌 외로움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매일 아침 서로 안부를 묻고 같이 밥을 먹고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면서 그렇게 모든 게 괜찮아졌다. 나의 작은 모험을 계속할 힘을 얻었다. 이곳에 잠시 베이스캠프를 치고 다음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고 싶어 졌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내가 어쩌다가 호주까지 가게 되었는지. 어떻게 계속해나갈 힘을 얻었는지. 새로운 도시의 마법이랄까, 몇 달이나 젖은 솜처럼 무거웠던 마음이 일주일 만에 뽀송뽀송해지다니. 가까이서 보면 누런 달걀 색인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새하얗게 빛나게 하는 남쪽나라의 강한 태양 때문이려나.


아이러니와 가난한 주머니가 만나,
호주에서 마지막 워킹홀리데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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