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구해줘

3월 넷째 주 캥거루 이야기

by 아델리


워킹홀리데이 비자 협정을 맺을 때, 한국 정부는 '홀리데이'에 좀 더 중점을 두지 않았을까. 여행을 할 만큼의 돈을 벌어 신나게 여행하고 돌아오라고. 반대로 인력난에 시달리는 호주 정부는 ‘워킹'에 좀 더 중점을 뒀을 것 같다. 와서 열심히 일하고 집에 가는 길에 여행도 좀 하고 가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3개국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언제나 '워킹'이었다. 이미 그 나라에서 지내는 자체가 여행이라고 생각했기에 ‘홀리데이'는 떠나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각자의 목적에 따라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다가 갈 수 있어서 워킹홀리데이가 좋은 게 아닐까.


만났던 친구 중에서는 농장에서 몇 주나 길어야 한 두 달 정도 일해서 돈이 좀 모이면 여행하고, 돈이 떨어지면 또 조금 벌어서 다시 떠나는 걸 반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도심지역에서 어학원을 다니면서 남는 시간에 알바를 하고 돈이 조금 모이면 근처로 며칠 정도 여행을 떠나는 이도 있었다. 내가 들었던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아예 한 스시집에 말뚝을 박고 1년을 꼬박 일해 번 몇 천만 원을 들고 귀국했다는 사람이다. 이 경우에는 홀리데이는 아예 제낀 거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분이 말았을 수많은 스시롤을 상상하니 몸서리가 쳐진다.


여행을 하든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누구도 저지하지 않으며 무엇을 하라고 강제하지도 않는다. 1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그 안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면 된다. 1년 동안 일은 최소한으로만 하고 탱자탱자 여행만 다녔다고 누가 욕을 할 것이며, 월화수목금금금 죽도록 일해서 왕창 번 돈을 들고 호주를 뜬다고 누가 손가락질을 하겠는가.


어차피 자기 비자고, 자기 인생인데.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으니, 일단 시드니에서 지내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디든 정착하려면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바로 일과 집이다. 일을 해야 지낼 곳을 구할 수 있고, 지낼 곳이 있어야 일을 나갈 수 있다. 둘 중에 하나라도 먼저 구하면 다른 하나는 그 주변에서 구하는 게 좋다. 특히 시드니의 교통비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비싸니까.


우선 일부터 구하자. 지난 일주일을 보낸 킹스크로스의 한인 호스텔은 일주일에 120불이었다(6인 도미토리 기준). 시설이 열악하고 엄지손가락 만한 바퀴벌레도 자주 출몰했지만, 가격이 착해서 외국인들도 더러 묵는 것 같았다. 여기서 일주일 더 묵기로 하고, 며칠 동안 시드니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이력서를 써서 출력했다.


이력서 다발을 들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사람을 구한다고 붙여 놓은 곳이든 아니든 괜찮아 보이는 곳에는 다 이력서를 냈다. 사람을 구한다고 붙여놓은 곳은 매니저와 짧게 인터뷰스러운 대화를 나눴고, 사람을 구한다고 붙여놓지 않은 곳도 혹시 자리가 나면 연락 달라고 이력서를 남겨 두었다. 사람 일이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되도록 많은 기회가 찾아오도록 해두는 게 좋다.


온라인으로 일을 알아보기보다는, 무식하지만 내가 직접 그 가게에, 카페에, 식당에 가보고 매니저를 찾아서 이력서를 주고 왔다. 어느 날에는 한인들이 많이 산다는 스트라스필드 Strathfield 에도 가봤는데, 집값은 시티보다 쌌지만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어서 구경만 하고 돌아왔다.


분식집도 있고 중국집도 있는 시드니 속의 한국, 스트라스필드.


며칠 동안 여기저기 이력서를 뿌리며 돌아다녔는데, 운 좋게도 금방 매점 겸 카페에서 연락이 왔다. 폴이라는 매니저와 간단하게 인터뷰를 보고 바로 출근이 결정되었다. 시급은 현금으로 12불 정도밖에 안되었지만 대신에 6-8시간 정도 근무할 수 있고, 별도로 세금과 연금을 내줘서 나중에 환급받을 수 있다고 했다. 오예. 시티잡인데 이 정도면 훌륭해!


한국인 가게의 경우 보통 시급이 10불 정도에, 세금이나 연금 없이 그냥 현금으로 줬다. 대신 근무 시간이 8시간에서 10시간 정도로 길었다. 호주인 가게의 경우 시급이 좀 더 높고 세금이나 연금을 내줘서 좋지만 근무 시간이 4시간 정도로 길지 않거나 스케줄이 들쑥날쑥인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이 둘의 장점을 합친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게다가 카페가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써큘러 키 Circular Quay 에 있었다. 사진으로 보던 시드니 하버 브리지 Sydney Harbour Bridge 가 바로 앞에 서 있었고, 고개를 돌리면 노란 태양 아래 하얗게 빛나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Sydney Opera House 가 보이는 명당이었다. 출근하면 이 풍경을 질리도록 볼 수 있다니. 매력적인 직장이다!


시드니 하버 브릿지와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써큘러 키. 많은 페리 선이 오가는 부두이기도 하다.






이제 집을 구할 차례군. 나한테 돈을 줄 곳을 찾는 것과 내가 돈을 줄 곳을 찾는 건 레벨이 다른 일이다. 일을 구하고 나니 집을 구하는 건 비교적 쉬웠다. 어디에서 살지 모를 때야 고민이 많지만, 일이 닻을 내려주면 그 주변으로 적당한 가격인 곳을 고르기만 하면 되니까.


온라인으로 몇 곳을 찍어두고 직접 집을 보러 다녔다. 당연한 말이지만 집도 되도록 직접 보고 고르는 게 좋다. 돈이 많이서 혼자 살게 아닌 다음에야 같이 사는 사람들도 중요하고 동네가 어떤지도 중요하다. 인터넷으로 사진만 보고 앞으로 몇 개월을 살 곳을 정하는 건 좀 위험하다.


직접 와서 보니 집이 사진이랑 많이 달라요(사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룸메이트랑 맘이 안 맞아요(안 맞는 사람과 매일 마주치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다), 집주인이 좀 이상해요(보증금이 걸려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몰랐는데 동네가 너무 위험해요(실제로 시드니 외곽 리드콤에 싼 집을 구했는데 동네가 위험해서 지나가다가 아무 이유 없이 린치를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등등. 그동안 들었던 ‘이 집에서 벗어나야 살 것 같은 이유’는 천일야화까진 아니어도 백일야화 정도로는 길다. 일단 잘 곳이 필요하다고 급하게 구할 일이 아니다. 집을 구하는 동안 호스텔에서 며칠 묵는 비용은 집을 여러 번 옮기면서 오는 비용과 스트레스, 불안에 비하면 매우 싸다.


시드니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다시 이사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신중을 기했다. 결국 시티 중심가에서 두어 블록 떨어진 서섹스 길 Sussex St. 에 있는 아파트 쉐어룸으로 낙점했다.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조용했고, 아파트 입구에도 가게가 있어 밤에도 그리 어둡지 않았다. 싱글 침대 3개에 별도 화장실이 딸려 있는 마스터 베드룸이라 집값이 약간 비싸긴 했지만, 이층 침대가 아니라서 좋았다(이층 침대 장기 투숙은 정말 노노). 무료로 쌀을 제공하는 것도 플러스였다. 겪어봐야 알겠지만 직접 만나 본 룸메이트와 집주인도 좋은 사람들 같았다.





일을 구하고 집도 구했으니 이제 ‘워킹’ 하면서 ‘홀리데이’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새로운 도시에 온 지 고작 2주 만에 일도 있고 집도 있다니. 일이 이렇게 술술 풀릴 수가 있나. 뉴질랜드에서 보낸 고난의 두 달이 떠올랐다. 모든 걸 접고 집에 가고 싶었는데, 이렇게 쉽게 정착하게 되다니 신기했다. 이런 생활을 포기하지 않아 다행이다. 호주에 오지 않았다면, 뉴질랜드에서 질질 짜면서 집으로 돌아갔다면, 두고두고 궁금해했을 것이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호주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포기하지 않았기에, 나는 어땠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내 20대의 마지막 2년을 멋지게 구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