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33
Cromwell, Central Otago
New Zealand
좀 길었나, 싶다가도 짧았던 것 같고, 짧았다고 생각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린 로드트립의 끝에 우리는 남섬의 중간보다 조금 더 남쪽에 있는 크롬웰에 닿았다. 크롬웰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체리 농장에서 수출용 체리를 고르는 일을 시작했다. 작황이 그닥 좋지 않아서 돈은 별로 못 벌었지만, 아주 잘 익어서 한 입에 넣으면 상큼한 과즙이 톡톡 터지는 탱글탱글한 체리를 원 없이 먹었다.
오늘은 농장 앞에 난 아주 긴 길을 걸어 크롬웰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농장에서 시내까지 나가는 길은 고속도로변을 걸어서 2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지루한 농장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던 우리는 그 정도 거리쯤이야 걸어서 갈 수 있지,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
뉴질랜드는 고속도로에도 가드레일조차 없는 곳이 많아서 별 걱정 없이 그냥 하늘 아래 쭉 뻗는 도로를 따라 걸었다. 언젠가는 시내에 닿겠지. 그럼 오랜만에 카페에도 가보고 슈퍼마켓에도 가야지. 야무진 포부를 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걷는데 자꾸만 눈에 뭐가 밟혔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것들이 도로를 따라 계속 이어져 있었다.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점점이 이어진 로드킬.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신나게 걷다가 계속 이어지는 사체에 이내 숙연해졌다. 더 이상 날지 못하는 새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납작해졌거나, 알아보더라도 뭔지 이름도 알 수 없을 동물들. 길이 온통 그들의 묘지였다. 우리는 그들의 묘지를 걷고 있었다.
한낮에 묘지 걷기는 평온하고 좋았다. 발 한 뼘 앞으로 맥주병이 날아들기 전까지는. 땅에 누운 새의 명복을 빌어주고, 이름은 모르겠지만 살아있었다면 굉장히 귀여웠을 작은 동물에게 잘 가라 인사하면서 고요히 걸었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굳이 창문을 내린 누군가가 욕설을 던지기 전까지는.
쭉 뻗은 묘지를 따라서 걸으며, 나는 평온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이곳이 내가 누울 곳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던진 맥주병이 발 앞이 아니라 머리 위로 떨어진다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저렇게 큰 소리로 욕을 하고 지나간 사람이 차를 돌려 이번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결심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여기가 나의 묘지가 될 수도 있겠구나. 저 수많은 동물들과 함께 이렇게 길가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겠구나.
뉴질랜드는 멋진 자연경관과 따뜻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종차별을 겪은 곳이기도 했다. 북섬에서도 가끔 불쾌한 일이 있긴 했지만 남섬에서 느낀 감정에 비하면 그때 느꼈던 건 말 그대로 불쾌함 정도였다. 남섬에서는 실질적이고 육체적인 공격을 당할 수 있겠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도 그냥 길을 걸을 때조차 바짝 긴장했다. 밝은 대낮에도 좁은 골목길이나 한적한 길은 혼자 다니기 무서웠다. 여기는 남의 나라니까 내가 조심해서 다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부당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름 모를 동물들의 묘지를 걷던 그날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사람에게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우리 말고는 걸어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는 쭉 뻗은 고속도로에서. CCTV도 없고 경찰도 없는 곳에서. 빠르게 차를 몰면서 맥주병을 던지고 욕을 하며 지나가는 그들에게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절대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주먹만 동그랗게 쥐었겠지. 그때도 지금도.
그때 그 사람은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