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37
Kawarau River, Otago
New Zealand
해가 구름에 가린 한적한 오후였고 오전에 내린 비로 젖은 도로가 검게 빛났다. 구불구불한 강을 따라 더 꼬불꼬불 이어지는 산길을 달리며 우리는 모두 내적 멀미를 경험하고 있었다. 벌써 몇 번을 오간 길이라 처음에는 눈을 떼지 못했던 바깥 풍경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나간 퀸스타운에서의 식사는 훌륭했고, 시내를 어슬렁 거리다가 밤에 숙소에서 마실 술도 한 병 샀다.
백미러 멀리멀리 물러나는 퀸스타운을 뒤로하고 함께 달리는 차도, 맞은편에서 오는 차도 없던 고요한 도로에서 그 일이 일어났다. 모두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릴 수도 있었을 사고가.
북섬에서는 키위 농장에서 반년을 넘게 보냈는데, 남섬으로 내려와서는 크롬웰의 어느 작은 체리 농장에 박히게 되었다. 픽커들이 체리를 따면 우리는 상한 게 없는지 골라내는 일을 했는데, 우리 농장만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작황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 일이 많지 않았다. 작은 농장에서 빈둥빈둥 시간을 때우면서 만두도 빚고 체리 파이도 구워 먹었다. 그러다 너무너무 지루해지면 한 시간 거리에 있던 퀸스타운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날씨는 오락가락했고 우리 마음도 들떴다 죽을 만큼 지루해졌다를 왔다 갔다 했다.
퀸스타운에서 크롬웰로 돌아가는 길은 이름도 범상치 않은 카와라우 강 Kawarau River 을 끼고 이어졌다. 물론 강은 수십 미터 아래 있었고, 우리는 수십 미터 위에서 가드레일도 없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분명 한 번쯤은 ”여기서 차가 굴러 떨어지면 그대로 끝이겠군“, 생각한 적이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무뎌졌다. 우리는 익숙한 길을 따라 골짜기를 돌고 넘어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살짝 젖은 도로에 바퀴가 미끄러지면서 차는 방향을 잃었다. 순식간에 중앙선을 넘었다. 운전을 하던 친구가 핸들을 급하게 꺾었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다. 우리는 수십 미터 아래 강이 흐르는 낭떠러지를 향해 미끄러져갔다. 지난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차가 가드레일에 막혀 멈출 때까지는 혼이 나간 듯 정신이 없었고, 차가 멈추고 난 뒤에는 온 차가 울리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 반대편으로 가야 해! 차가 중앙선을 넘었어! 중앙선을 넘었다고!!”
친구가 후들거리는 손으로 방향을 틀어서 중앙선을 넘었고, 조금 더 차를 굴려 갓길에 멈춘 뒤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네.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 차를 막아준 가드레일은 이어져 있지 않았다. 우리가 미끄러지던 그 순간에, 미끄러지던 그 장소에, 가드레일이 있지 않았다면 우리 차는 데굴데굴 굴러 강바닥에 처박혔을 거고, 한국에 있던 가족들은 어처구니없는 사고 소식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제자리에서 몇 번 폴짝폴짝 뛰고 손을 탈탈 털고 서로 꼬옥 안고 어깨를 툭툭 치고는 다시 남은 길을 운전해 돌아왔다. 그날의 집으로. 나의 집으로.
카와라우 강은 그 위를 연결하는 다리에서 하는 번지점프로 유명한 곳이다. 한국 영화에도 나온 적이 있다. 사람들은 비싼 돈을 지불하고, 자신의 차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서 다리에 오른다. 밧줄은 튼튼하지만 당신에게 충분한 스릴을 안겨줄 수 있다고 단언하는 회사의 말을 믿고 점프대에 선다. 가슴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여러 차례 한 뒤에도 나아지지 않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푸른빛의 강을 향해 뛰어내린다.
북섬을 여행할 때 거기서 유명하다는 번지점프 어트랙션에 가서 구경을 한 적이 있었다. 큰 관광버스가 한대 들어오더니 똑같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점프대 앞에 길게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모두가 짠 듯이 똑같은 포즈로 뛰어내려 입고 있던 똑같은 티셔츠를 머리 위로 벗어던졌다. 강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줄이 없는 번지점프의 끝은 죽음인데, 줄이 있는 번지점프의 끝은 스릴이다. 심장이 멈추는 죽음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가 된다. 삶과 죽음의 차이가 오직 밧줄 하나에 달려 있다.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것에서 엄청난 스릴을 느끼고, 그걸 놀이로 만들어서 여럿이 함께 즐기는 건 아마 인간뿐일 거야. 자기 차례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지는 일련의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생존을 축하하는 의미로 술을 진탕 마시고 우리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밤새 떠들었다. 이 작은 사고로 인해 우리의 길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인생이 생각보다 길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게를 실어주었지만 그것도 그날 밤뿐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또 똑같이 지루한 하루를 맞이했다. 이어지지 않는 가드레일로 인한 여파라고는 다음날에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숙취 때문이라고 서로 둘러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