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심리상담 3월

by 아델리


3월 내내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상담은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받으러 갔지만, 글을 쓰지는 않았다. 우울증이 나를 가장 깊은 심해로 끌고 내려간 한 달이었다. 깊이 가라앉아 까마득한 수면을 바라보면서 내가 등을 대고 누운 이곳이 바닥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상담을 이어가면서도, 이게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나 의구심이 드는 한 달을 보냈다. 매번 가서 똑같은 얘기를 하고,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벽에 막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매번 똑같은 생각의 회로에 갇혀서, 매번 똑같은 문제에 부딪히고, 그래서 똑같은 고민을 토로한다. 늘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뭐가 문제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잘 살고 있지 않다고 되뇌며 계속 괴로워한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무엇도 할 기운이 없어서 웅크리고 누워서. 그럼에도 이전에 만나기로 한 친구들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꾸역꾸역 나가서 하소연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우울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도, 하소연을 늘어놓는 것도, 그래서 친구들이 괜찮은 곳이라며 추천해 준 정신과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도 — 그러고 있는 나도, 정말 싫었다. 친구는 약을 먹으면 좋아질 것 같다고 했는데, 나는 스스로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적합한 결정권자가 아닌 것 같다. 내가 약을 먹을지 말지를 나 말고 대체 누가 결정할 수 있지? 그런데 그 결정을 할 수가 없다.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 부적합한 상태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최근에 반쯤은 취미로 반쯤은 치료가 될까 싶어 친구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내가 가장 잘하는 짓을 했다. 그림을 그려 선물을 하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한 획 한 획 붓질을 할 때마다 망했다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런 건 선물하는 게 민폐야, 민폐라고. 불만 가득한 얼굴로 즐겁지도 않은데 왜 굳이 이걸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림이 좋아서 그리는 게 아니라, 이걸 하면 좋아질 수도 있으니 일단 해보자고 시작해서는, 그게 뭐든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나는 해야 하는 일은 해야 한다. 하기 싫어져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하는 게 더 이상 즐겁지 않아도 — 심지어는 괴로워도, 그게 해야 하는 일이 되면 해야 한다. 나는 이상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이렇게 이상하게 꼬인 프로그래밍이 한두 개가 아니다. 게다가 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무의식적으로, 어떤 타당한 이유도 없이. 그냥 이렇게 해야 해, 못 박아놓고 힘들고 고달파도 어거지로 그렇게 하고 살아왔다. 예전에는 맞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맞지 않는 — 아니, 정말로 많이 틀린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선생님은 구조의 변경, 혹은 재구조화가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달 동안 상담을 진행하면서 나의 이상한 프로그램을 몇 가지 찾을 수 있었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중략)
더 넓게 보자면 ‘프로그램’이란, 인물 자신도 잘 모르면서 하게 되는 사고나 행동의 습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여행의 이유』 중에서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늘 완벽을 기해야 해


선생님은 나의 괴로움의 대부분은 일에서 오는 것 같은데 정작 일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고 일반적인 일들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회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을 할 때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결국엔 내가 이 일을 잘 해내려면 더 공부하고 노력해야 하는데, 신경만 쓰지 실제로는 하지 않는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해야 하는 일이면 어떻게든 해내왔는데, 더 이상 그렇게 되질 않는다. 그러니 내 삶이 거대한 시간 낭비 같다. 선생님은 시동은 걸어놓고 움직이지 않는 차 같다고 말했다. 기름은 닳고 있는데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스스로 브레이크를 단단히 밟고 있어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하는 브레이크는 무엇일까? 나는 내 이상한 완벽주의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높은 목표를 설정해 놓지만, 어떻게 하면 가서 닿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달이 눈에는 보이고 아름답지만, 결코 닿을 수 없듯이. 선생님은 완벽주의가 있다는 말은 스스로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반증이라고 했다. 내 머릿속에 어떤 완벽한 인간상을 그려놓고, 나를 거기에 맞추려고 애쓴다. 완벽한 인간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허상인데, 아주 악독하게도 내가 뭘 하려고 하면 거기에 싹 스며들어와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버전을 그려놓는다. 허상이면 무시해 버리면 되는데, 내가 무언가에 임할 때에는 너무 생생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그려놓으니까, 그 그림에 나를 맞춰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아무리 해도 그 허상에 가까워질 수 없고, 그러다가 스스로를 자책하며 멈춘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남는 것은 깊은 자기혐오뿐이다.


몇 년이 지나도 늘지 않는 것은 내가 이 일이 정말 싫은 게 아닐까? 하면 할수록 자신감도 자존감도 떨어지는데 이 일이 나에게 맞는 일인가? 점심 메뉴 같은 쉬운 것에서부터 진로 같은 어려운 것까지 어느 하나도 스스로 판단할 수가 없다. 나의 주관성도 문제다. 주관적으로 나에 대한 의견이 명확하지 않으니, 자꾸만 그걸 외부에 있는 기준으로 객관화하고 수치화하고 일반화하려고 한다. 선생님은 주관, 즉 셀프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에고에 가깝고 에고에서 셀프로 자라나는 시기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지 주관적인 기준이 없다.



세상에 조건 없이 베푸는 호의란 없어


지금 나는 남들의 호의에 기대서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 조건 없는 호의를 그냥 좋게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예를 들어 누가 비싼 밥을 사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얻어먹으면 되는데, 차려진 그 밥상을 맘 편하게 받지도 못한다. 내가 반을 내거나, 아니면 다음에는 내가 밥을 살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다. 둘 다 하지 못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불편하고, 다 먹고 나서는 갚을 수 없는 빚처럼 마음속에 쌓인다. 내가 남에게 빌붙어 사는 기분이 들어서, 외적으로는 그게 어떻게 표현되는지 모르겠지만 내적으로는 꽤나 불편하다.


물론 사주는 사람은 무슨 대가나 반대급부를 바라는 건 아니다. 이 사람은 나와 함께 맛있는 밥이 먹고 싶은데, 지금 내 벌이가 시원치 않으니 부담이 될 까봐 형편이 나은 본인이 사는 것뿐이다. 충분히 얻어먹을 수 있는 사이인데도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왜일까? 나한테 갚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는 무조건 나보고 사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만약 밥을 사는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나도 별생각 없이 밥도 사고 술도 사고 했을 텐데. 나라면 상대에게 대가를 바랐을까? 아니다. 나 또한 그 사람과 같이 맛있는 걸 먹고 좋은 시간을 보내며 함께 하는 게 좋아서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남이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지 모른다.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자서 빚 정산을 계속하고 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원인은 또다시 부모님에게 도돌이표처럼 돌아간다.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부모님이 베풀어 주는 걸 조건 없이 받아본 경험이 없다. 늘 보답해야 할 반대급부가 존재했다. 이제는 내가 반대급부를 줄 수 없으면 받는 게 마음 편하게 되지 않는다. 혼자서 마음속에 장부를 두고 계산을 하고 있다. 언젠가는 갚아야지, 언젠가는 갚아야지, 혼자 중얼거리면서. 아무도 그러라는 사람이 없는데도.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나에게 맞지 않는 자리야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믿는다. 내가 속해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나로 한동안 살아간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서 원래의 내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내가 아닌 것을 그런 것처럼 꾸미고 살 순 있지만, 그런 상태로 오래 지낼 수는 없다. 그래서 또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또 떠난다. 내가 있을 자리를 찾아서 새로운 곳으로 가서 다시 시작하고, 또다시 시작한다.


20대에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유랑을 하던 시기에는 그게 가능했다. 가족의 굴레가 싫고 답답한 한국에서의 내 처지가 싫어서 떠났다. 한 곳에 정착해서 지내다가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싫어졌거나,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내가 싫어졌거나, 지내던 곳이 지겹고 싫어지면,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만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는데도 그 패턴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직면해야 하는 문제가 있으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다. 아, 여행이 가고 싶어서 그런가? 잠시 여행을 다녀와도 돌아오면 또 똑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인데도 어안이 벙벙하다. 왜 여행을 했는데도 괜찮아지지 않지? 이제는 여행을 떠나서도 즐겁지가 않다. 다시 돌아가면 마주해야 할 것들이 떠올라 괴로워한다.


비슷한 느낌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든, 내가 원하던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해야 하는 일들을 하면서 살았으니까, 남은 여생은 적게 벌어도 좋으니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문제는 그게 뭔지를 모를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해도 내가 원하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떠돌아야 할까. 내가 존재하는 지금 여기가 나에게 맞는 자리가 되려면 뭘 해야 할까.



이 모든 것을 묶어서 완성해 주는 죄책감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걸 위해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을 강제하고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목표치에 닿지 못하면 더 노력하지 않았다며 자책한다. 나와의 약속이라고 해도 그걸 지키지 않는 것은 죄책감을 가질 일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게 싫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건 더 싫다. 그러니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약속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믿는다.


세상에 조건 없는 베풂은 없다. 즉,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나에게 베풀어진 건 언젠가는 다 갚아야 하는 것들인데 나는 갚을 수 있을까. 갚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받는 것, 이 또한 죄책감을 가질 일이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부모 자식 간에도 보답이 필요하니까, 그 아래 있는 모든 관계에도 당연히 반대급부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질 때면 나의 책임과 주변 사람들과 모든 의무로부터 달아난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면서 깨달은 건, 아무리 멀리 도망간다고 해도 내가 가진 문제들로부터, 이 지긋지긋한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오래된 패턴이 과거에는 나를 살렸지만, 더 이상은 유효하지 않다.



우리는 아픔에서조차 기준이 높다. 일상이 처참히 망가질 정도는 돼야 치료받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고통은 참다 보면 익숙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에 익숙해진다고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다. 또 참는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정신과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만 가는 곳이다?
『정신과 사용법』 중에서


나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렇게까지 괴로워할 일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마음은 힘들어 죽을 것 같다. 그래서 이도저도 결정하지 못한다. 선생님은 내가 스스로에게 상당히 가혹한 거라고 했다. “이 정도로 뭐, 울 일은 아니잖아”라고 하는 거라고. 마음이 너무 괴롭다고 말하면서 나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선생님이 괴롭다면서 왜 웃냐고 물었다. 나는 아마도 머리가 웃는 것일 거라고 답했다. 머리가 볼 때 그 정도로 힘든 상황은 아닌데 마음이 그렇게 힘들어하는 게 웃긴 것 같다고.


지금까지 나는 괴롭고 힘들다고 할만한 요소들을 다 제거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왜 아직도 괴롭지? 아니, 왜 예전보다 더 괴롭지? 전에 비하면 분명 팔자가 좋아졌는데, 아직도 이러고 있다. 혹시 적응이 안 되는 건 아닐까요, 선생님이 물었다. 나에게는 항상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늘 고군분투할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게 없는 지금도 어떤 문제든 만들어서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일까. 더 이상 맞지 않는 구조에 나를 구겨 넣고 살고 있는 걸까. 이상하게 꾸부러져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나는 항상 괴로워해야 하니까. 그게 나니까.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