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2016 _ 여행 0일 차
왜 홍콩으로 가는지 모른다.
가서 뭘 할지도 모른다.
흔한 여행책자 하나 없이,
수많은 맛집 리스트와
블로그 포스트를 물리치고 혼자서 간다.
그 어떤 계획도, 부푼 기대도 없이.
마치 옆집에 놀러 가듯, 그렇게.
버스 타듯 비행기를 잡아타고, 그렇게.
홍콩으로 간다.
몇 년 전 출장 때 쓰고 처박아 둔 작은 캐리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떠날 날이 성큼 다가와, 그냥 큰 캐리어를 헐렁하게 들고 가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베란다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커다란 캐리어를 꺼내서 열어보니, 그 안에서 마술처럼 작은 캐리어가 나타났다. 짜잔.
이틀 동안 작은 캐리어가 좁은 방에 입을 벌리고 앉아 있었다. 필요하리라 생각한 모든 것을 던져 넣었다. 3월의 홍콩은 따뜻하다 못해 덥다는 말에 계절에 안 맞는 반팔 티셔츠가 몇 벌 들어갔다. 화장품 샘플, 속옷, 양말을 싸고 나니 딱히 필요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 고작 며칠 떠나는 여행에 뭐가 그리 많이 필요하겠어.
느슨하게 싼 짐을 책상 밑에 숨겨놓고 아무렇지 않게 업무를 시작한다. 여러 업체들의 시달림을 이겨내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묵묵히 받아내며 오직 퇴근시간만을 기다린다. 퇴근길에 익숙한 지하철에 올라, 오늘이야말로 집이 아닌 공항으로 간다. 그 생각에 마음이 콩닥콩닥 하다.
빨리 퇴근해야 하는 날은 늘 일이 더 몰린다. 급하게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여섯 시가 되자마자 정신없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뜬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는다. 그저 별일 없기를 바랄 뿐.
홍콩에 사는 친구 셋이 기꺼이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한 곳은 홍콩 외곽인 TAI PO 지역에 위치한 호주에서 만난 친구 B와 K의 신혼집이고, 다른 한 곳은 뉴질랜드에서 만난 친구 C의 집이다(정확히는 C의 부모님 댁이겠지만). C의 집은 북적이는 센트럴 지역에서 약간 벗어난 TSEUNG KWAN O 역 근처에 있다.
금요일 밤에 출발해 4일을 홍콩에서 보내고 화요일 밤에 다시 비행기를 잡아타고 돌아오는 일정. B와 K의 신혼집에서는 주말을 보내기로 하고 월요일에 C의 집으로 옮겨 하루만 신세를 지기로 했다.
숙박비가 빠진 예산은 맥주에서 거품만 남은 것처럼 가벼워졌다. 누군가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 있을 때는 호텔에 머무는 것이 시간낭비 같이 느껴진다. 밤늦도록 시간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은 마음을 무겁게 하니까.
이번 여행은 사실 홍콩에 놀러 간다기보다는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그들이 사는 공간을 방문한다는 마음이 더 크다. 홍콩 자체에 큰 기대감이 없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그 영향 때문이겠지. 좋으면서도 마음이 싸하다. 여행에 기대감과 설렘이 빠져있다. 김 빠진 사이다처럼 은근한 단맛만 입가에 머문다.
짧은 여행 중에는 최대한 많은 걸 보고 담으려는 욕심 때문에 늘 분주한 마음으로 허겁지겁 돌아다니는 기분이 든다. 해가 쨍쨍한 날이 좋을 때가 있으면, 구름이 낀 흐린 날이 좋은 때도 있는 법. 좀처럼 흐린 날이 없는 홍콩인데, K도 C도 며칠째 흐리고 비가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홍콩의 날씨가 허락한 대로, 평소와는 다른 목표를 세운다.
최대한 느리게 움직일 것
사진은 최소한으로 찍을 것
못 본 게 있더라도 아깝게 생각하지 말 것
B는 영국 웨일스에서 왔다. K는 한국 서울에서 왔다. 그들은 호주 애서튼의 한 호스텔에서 만났다. B는 맥주를 엄청나게 많이 마셨고, K는 몰래 담배를 피웠다. 둘은 가끔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를 했다. K가 먼저 시드니로 떠났고, 얼마 후 B도 시드니를 다음 목적지로 정했다.
둘은 혼잡한 도시에서 다시 마주쳤다. K는 도움이 필요했고, B는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큰 도시의 외로운 구석에서 둘은 자주 만났다. B는 K가 점점 좋아졌고, K는 B에 점점 의지했다. 오래지 않아 둘은 사랑에 빠졌다. 암울한 기억이 가득한 시드니를 떠나 햇살 가득한 브리즈번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호주에 정착하길 원했지만 야속한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끝내 영주권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만료되고 말았다. 둘은 호주를 떠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하나가 아침을 맞으면 다른 하나는 하루를 마감하는 시차 속에서도 늘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함께 살 곳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홍콩에 정착했다.
모두가 진짜 사랑을 찾아 고민할 때, 그중 몇몇은 사랑을 포기하고 또 몇몇은 사랑을 속일 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서로의 옆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는 찬란한 증거와 같은 커플이다.
허겁지겁. 그동안의 내 생활을 줄이면 그렇다. 급할 게 없는데도 늘 허겁지겁이다. 약속에 늦은 게 아닌데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빠르게 걸어나가고, 횡단보도에 서면 재빠르게 무단 횡단할 기회를 잡으려 애쓴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른 채, 진짜 중한 게 뭔지도 모른 채, 그냥 간다. 급하게 간다.
무작정 멈춰버리고 싶은 충동이, 어디로든 달려 나가버리고 싶은 날들이, 어깨에 뭉친 근육처럼 무겁게 내리누른다.
그래서 간다. 홍콩에.
뭐하는지 모르고 싶어서.
모르는 길에서 아주 느리게 걷고 싶어서.
그래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