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08 | 황금사원의 먼지

FEB2015 _ 여행 3일 차 :: 루앙프라방 왓 씨엥 통 사원

by 아델리


라오스 최초의 통일 왕국 란상(Lan Xang)의 수도였던 루앙프라방에는 찬란했던 도시의 기억을 간직한 불교사원들이 도시 곳곳에 잘 보존되어 있다. 여행객들만 북적대는 이름뿐인 명소가 아니라, 오늘의 루앙프라방을 사는 이들의 일상에도 깊이 녹아 있는 장소다. 조금 먼지가 쌓이고 약간 낡았지만 여전히 희망과 위안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수백 년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사원들.


루앙프라방에 있는 사원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는 왓 씨엥 통(Wat Xieng Thong) 사원만 해도 그렇다. 엄청난 보물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아주 작고 한적한 골목길에 소박한 입구를 내고 앉아 있다. 책상과 의자뿐인 간이 매표소에 지폐 몇 장을 내고 들어가면, 안은 딴 세상이다. '황금도시의 사원'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눈부신 광경이 펼쳐진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복원작업을 했단다. 복원작업이 끝난 사원을 볼 수 있어 얼마나 운이 좋은지.


1560년에 완성된 사원이라는데, 최근 몇 년 동안 부지런히 복원 작업을 했는지 어제 지어진 듯 깔끔하다. 은근한 오전의 햇살 아래서도 번쩍번쩍. 금색으로 눈부시게 빛난다. 한낮에 보면 눈이 아플 지경이다.


(1560년이면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명종 15년으로, 천 원 지폐에 계신 퇴계 이황 선생님이 생존해 계시던 옛날이다. 서울육백년사 연표에는 1560년 12월에 임꺽정이 잡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 옛날이여.)




붉은 바탕이 눈을 사로잡는 와불법당


사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선명한 붉은색 바탕의 작은 법당이 눈에 들어온다. 프랑스 식민 정부 당시 '붉은 예배당(La Chapelle Rouge, Red Chapel)'으로 불렀던 와불 법당이다.


황금색 문양이 가득한 정면 입구를 제외한 나머지 벽면에는 작고 반짝이는 색색깔의 유리로 모자이크가 박혀 있다. 모내기하는 여인들, 코끼리를 타는 사람들,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 소떼.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디테일이 살아 있는 나무는 바람이 불면 잎사귀가 흔들릴 듯 푸르게 빛난다.


이 모자이크는 1950년도 후반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이르신 지 2500년이 된 기념으로 만든 거라고 하는데, 종교적인 내용만이 아니라 라오스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도 잘 표현되어 있다. 조금씩 뜨거워지는 라오스의 햇살이 스며든 모자이크를 찬찬히 살펴본다. 뭔가 엄청난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점점 강해지는 볕에 볼이 잘 익은 사과처럼 발게졌을 때서야 옆에 있는 홍 켑 미엔(Hohng Kep Mien) 법당으로 발길을 돌린다. 법당 바깥 벽은 한층 업그레이드된 황금 장식으로 가득하다. 벽에다 붓으로 그리는 걸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정교한 나무 조각 위에 황금을 끼얹어 놨다.


더운데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또 입구에 한참을 서성인다. 머리카락 한올 한올, 표정 하나하나까지 꼼꼼한 조각을 바라보고 있자니 늘 찾아 헤매던 마음의 평화가 어느새 마음속에서 일렁대는 게 느껴진다.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불길이 이는 황금의 바다에 앉아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다. 아무리 봐도 어떻게 인간의 손에서 이런 표정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싶다.



결국 약간 더 익은 상태로 법당 안으로 들어간다. 햇빛이 창문 사이로 비치는 어두운 법당 내부는 기분 좋게 서늘하다. 바닥에 깔린 대리석의 차가운 기운이 지친 발바닥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홍 켑 미엔 법당은 씨싸왕웡이라는 왕의 운구용 마차를 보관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안에는 당시 사용한 운구용 마차가 고이 보관되어 있다.


법당 한가운데에 길게 자리 잡고 있는 운구용 마차의 높이는 무려 12미터. 이렇게 큰 마차가 어떻게 안으로 들어왔는지는 미스터리다. 마차의 앞쪽에는 힌두 신화에 나오는 뱀 모양의 신, 나가(Naga) 일곱 개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서 있다.


법당 내부에도 유리로 된 모자이크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 벽면에 가득하고, 안쪽에 선 불상의 넉넉한 미소는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이토록 화려하고 깔끔한데도 어딘가 모르게 먼지가 가득 내려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홍 켑 미엔에서 열을 식히고 드디어 대법당, 씸(Sim)으로 들어간다. 여러 겹의 치마가 살포시 내려앉은 모양처럼 겹겹의 지붕이 우아하게 바닥으로 떨어진다. 절 안과 밖의 모든 벽도 역시 황금 문양으로 빈틈없이 뒤덮여 있다. 밑바닥부터 높은 천장 꼭대기까지 한 붓 한 붓 그림과 문양을 그리면서 화공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주 오래된 공간에 가면 그 시간의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나와 같은 사람이 수백 명, 수천 명이 죽고 또 태어나는 동안 이 사원은 같은 모양으로 똑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만약 그 긴 시간 동안 아무도 이 사원을 살피지 않았다면, 혹은 누군가 이 절을 파괴해 버렸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유물을 마주했을 것이다. 색이 바래고 우중충한 형태만 남아서 그 가치를 아는 연구자들이나 돌아볼 만한 곳. 혹은 아예 절터만 남아서 그곳을 찾는 몇몇 한가한 사람들의 가난한 상상력에 기대야만 하는 곳.


가끔 인간의 상상력이 과대평가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무궁무진한 상상력으로 전에 없던 엄청난 것을 만들어내 세상을 바꾸는 소수의 천재들을 제외하면, 나처럼 평범한 사람의 상상력이란 얼마나 볼품없는지. 내가 남은 삶의 모든 시간을 쥐어짠다고 해도 이 사원의 벽면 하나라도 온전히 그려낼 수 있을까. 장인의 정성에 눈물이 날 것 같은 사원에 앉아 홀로 우주의 먼지가 된 듯 공중을 떠다닌다.


황금으로 기록된 영광과
벽면을 가득 채운 대서사시 사이를
자유롭게 떠다니는 황금사원의 먼지




아마도 사원에서, 혹은 루앙프라방에서 가장 유명한 삶의 나무 (Tree of Life).


대법당 뒤편에는 부처님의 삶을 모자이크로 표현한 삶의 나무(Tree of Life) 모자이크가 있다. 햇살에 따라 빛나는 모습이 조금씩 다른데, 그중에서도 노을이 비추는 늦은 오후 시간에 가장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설익은 오후의 햇살이 비추는 모자이크 앞에 서서 빛은 어떻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 앉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볼 수만 있다면.


나는 종교에 대해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각을 갖고 살아왔다. 이십 대 초반부터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는데, 결론적으로 신이 있다고 믿는 쪽을 택했다. 신이 진짜로 존재하는지, 어떤 형태나 성격을 가지고 존재하는지는 모른다. 나는 다만 내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사실만 안다.


오랜 시간 신의 존재와 그분의 보살핌을 믿어 왔지만, 종교를 갖는데 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에게 종교는 신께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나뭇가지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듯,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있다고 믿는다. 꼭 정해진 종교만 길인 것은 아니고, 신을 믿지 않는다고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큰 그림에서 보면 모두 그 나름의 길이 있다.


나는 수많은 길 앞에서 오랫동안 서성였고, 결국 길이 내 발 앞까지 날 데리러 와주었다. 누구든, 어떤 경로로 어떻게 그 길에 닿게 되든, 자신이 택한 길을 따라서 걸으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에게 왜 나와 다른 길을 가냐고 물을 필요도 없고, 나보다 앞서 나간다고 시기할 필요도 없다. 이 길엔 독선이나 경쟁이 끼어들 구석이 없다. 빛나는 모자이크의 곧게 뻗은 가지가 결국 모두 부처님께 닿듯이, 온 마음을 다해 오롯이 뻗어나가면 된다.




사원에서 한나절을 보낸 뒤 볶음밥과 큰 비어라오로 점심을 해결하고 루앙프라방 국립 왕궁 박물관(Ho Kham)으로 페달을 밟았다. 꽤나 요란스럽게 꼬불랑 거리는 글씨가 박힌 박물관 안내판 앞에 자전거를 잘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간다. 한낮의 뜨거움은 좀 가셨지만 여전히 퍽 더운 오후다.


왓 호 파방으로 엄마와 아이들


정문으로 들어가서 바로 왼쪽으로 꺾어 입장권을 구입하고 뒤돌아서면 다시금 눈이 아프도록 빛나는 사원을 볼 수 있다. 새하얀 돌계단 위에 다시금 금빛으로 빛나는 왓 호 파방(Wat Ho Pha Bang). 왕궁 입구에 있는 이 사원은 파방이라는 신성한 불상을 모셔둔 곳이다. 라오스에서 가장 신성시된다는 이 황금 불상을 모셔둔 내부는 당연히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다. 좋은 건 오직 눈으로만 보시라.


국립 박물관의 늠름한 자태


황금과 늦은 오후의 열기에 지쳐갈 때쯤, 시원한 그늘이 보장된 국립 박물관으로 몸을 숨긴다. 그동안 왕이 세계 여러 나라로 부터 받은 진귀한 선물을 모아 전시해둔 박물관 역시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보물은 루앙프라방에 숨겨져 있는 모양이다.


선물 외에도 이전에 실제로 사용하던 가구와 복식 및 예술품도 볼 수 있어 익숙하지 않은 라오스 문화를 조금은 친근하게 접할 수 있다. 일정이 아주 급한 여행자가 아니라면 한 나절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더운 날에 발바닥에 땀나도록 돌아다녀도 마냥 좋은 루앙프라방의 빛나는 한 조각.


박물관 입구에서 바라본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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