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02 | 얌차, 야무지게 먹기

MAR2016 _ 여행 1일 차 :: 얌차

by 아델리


"Welcome back!"

공항으로 우릴 마중 나온 B가 말했다.
생전 처음 온 곳인데도
그 말 한마디에 집에 온 듯 포근해졌다.
조금은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처음 온 도시에서 환영받는다는 것은.




금요일 밤 9시 25분 제주항공


마침 한국에 와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 K와 같은 항공편을 끊었다. 공항에서 오랜만에 만난 K는 볼이 통통한 아기를 안고, 도대체 어떻게 들고 온 걸까 싶을 정도로 많은 짐과 함께 서있었다. B는 홍콩 공항에 마중 나와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도착 예정시간은 자정을 넘은 12시 25분경이었지만, 역시나 비행기는 연착되었고 새벽 1시가 넘어서야 홍콩국제공항에 내렸다. 아기를 안은 K를 따라 짐을 부려 출국장으로 향했다.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촘촘히 선 사람들 사이에, 전보다 살이 오른 B가 싱글벙글 웃으며 서 있다. 홍콩에도 회식이 많은가. 그래도 장난기 가득한 예전 얼굴이 묻어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시간이 늦어 한산한 공항을 벗어나 택시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길. 시내로 들어가는 빨간 택시와 외곽으로 나가는 초록색 택시가 양 옆으로 나란히 서 있다. 맨 앞에 선 초록색 택시 트렁크에 짐을 태우고, 잠시 버벅거리다 왼쪽으로 돌아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뭔가 어색하다.




그와 그녀의 집


TAI PO 지역에 있는 B와 K에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시 무렵. 신혼집은 원래 B의 할머니께서 지내시던 작은 집으로, 어느 날 가족들을 만나러 웨일스에 가신 할머니가 영영 홍콩으로 돌아오지 못하시는 바람에 빈집으로 남게 되었다. (고령으로 인해 더 이상 비행기 이용이 불가능하셔서 그만...)


사람 일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른다고는 하지만, 자식들 만나러 갔다가 졸지에 이민을 하시게 되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할머니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이 집이 이제는 아기용품으로 가득 찬 신혼집이 되었다. 홍콩의 살인적인 집값을 생각하면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집은 꽤 (사실 무서울 정도로) 낡은 5층짜리 아파트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크고 작은 가방 여러 개와 커다란 유모차까지 들쳐 메고 최대한 조용히 가파른 계단을 오르느라 진땀을 뺐다. 할머니가 지내시기엔 굉장히 불편한 집이다. 어쩌면 할머니는 웨일스에서 더 행복하실지도.



현관은 이중문으로 되어 있는데, 바깥쪽에 쇠철창으로 된 문이, 안쪽에 완전히 막힌 대문이 있는 식이다. 아마도 더운 날엔 바깥쪽 문만 잠가두고 지내겠지. 어두컴컴한 집 안 바닥은 욕실에나 깔법한 타일이 깔려 있어 실내화를 신고 다녀야 한다.


신발장이 따로 없어서 문 앞에서 신발을 벗고 그 바로 옆에 놓인 실내화로 갈아 신는다. 이게 위생상 과연 도움이 되는지는 조금 의심스럽지만, K가 내민 실내화를 기쁘게 받아 든다. 계단에 지친 발의 피로를 풀어줄 지압 슬리퍼다.


지압 슬리퍼의 고통을 눌러가며 제일 안쪽에 있는 화장실부터 반대편 끝인 거실까지 집을 쭉 둘러본다. 천장은 생각보다 높지만 집이 전체적으로 막힌 구조라 어둑어둑하다. 모든 벽의 맨 꼭대기는 뻥 뚫려 있고 꽃 모양일 것으로 추측되는 쇠 창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아마도 더운 여름 공기 순환을 위한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타일이 깔린 집 안은 아기가 기어 다니게 놔두기엔 마음이 불편해서, 안방과 거실에만 장판을 깔았단다.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거실로 들어가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역시 장판이 좋구나. 온 가족이 거실에 널브러져 얼른 자야겠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동틀 무렵까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얌차, 그 맛있는 문화


새벽 5시까지 이어진 대화는 오늘 일어나면 뭘 할지 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B가 나름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표정으로 집 근처 있는 얌차 식당을 추천했다. 동네에서 얌차를 잘하는 집이 근처에 있단다. 근데 얌차가 뭔가요.


여기엔 얌차라는 게 있지.

얌차? 귀여운 이름이네. 맛있겠다.

별건 아니고, 그냥 몇 가지 음식을 시켜놓고 차를 마시면서 시간 때우는 거야.


얌차. 뭔가 맛있는 느낌이 드는 이름이다. B의 설명에 따르면 얌차 식당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여는데, 평일에는 은퇴 후 한가한 분들이 이른 아침부터 가셔서 아침 식사를 하고 신문을 읽고 이야기도 나누는 곳이란다. 싼 가격에 음식과 차를 내주는 홍콩의 사랑방. 새벽부터 가셔서 아침은 물론이고 점심까지 해결하시는 분들도 있다는데, 이 정도면 사회의 유지와 안녕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지 않나 생각해 본다.


평일에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얌차 식당은 주말이 되면 화합의 장으로 변한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모여 뜨끈한 중국차를 마시고 종류별로 음식을 시켜 나눠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한 번 앉으면 몇 시간은 기본이라서 주말엔 얌차 식당에 줄이 엄청나게 길다고 한다. 시차 적응이 필요 없는 B가 먼저 가서 테이블을 잡기로 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겨우 네댓 시간을 자고 일어나 B는 약속대로 테이블을 잡으러 달려 나갔다. 정말 피곤한데 정신만 말짱한 이상한 상태로 세수를 하고 아기와 아기용품이 그득한 가방을 챙겨 나왔다. 꾸물꾸물한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은 홍콩의 아침. 날씨에 연연하진 않지만, 기분이 차분히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다.


B의 말대로 우리가 간 얌차 식당은 일대에서 꽤 유명한 핫플레이스였던 모양이다. 엄청나게 큰 홀이 여러 개 있었지만 빈자리는 없었다. 비교적 잘 차려입은 사람부터 늘어진 운동복을 입은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게 반짝이는 샹들리에 아래 둘러앉아 끝없이 차를 마시며 끝없이 음식을 먹고 끝없이 수다를 떤다.


손님이 엄청나게 많은 결혼식에 온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이 나오자 B가 익숙하게 숟가락과 젓가락, 찻잔, 작은 개인용 그릇을 뜨거운 물로 부신다. 옆 테이블의 아줌마도 아직 오지 않은 친구들을 기다리며 똑같이 식기를 헹군다. 이유가 뭘까.


설거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

→ 사용하기 전에 개인이 헹군다

→ 더 설거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대략 이런 사이클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따끈하게 헹궈진 식기를 받아 든다. K가 따뜻한 찻잔에 아주 진한 차를 한 잔 따라주자, 곧 음식이 나온다.



튀긴 닭발과 소스가 올라간 쌀밥

야채와 계란이 들어간 버미셀리 국수

그다지 짜지 않은 새까만 간장을

듬뿍 뿌려먹는 새우가 들어간 찹쌀떡

새우가 비쳐 보이는 보들보들한 딤섬

간 고기와 생선살이 들어간 딤섬

안에 치즈와 새우가 들어간 튀김

안에 고기가 든 작은 찹쌀 도넛

맵게 양념된 돌돌 말린 찹쌀떡


특히 하얀색 반죽이 들어간 음식이 많은데, 실제로 먹어보면 찹쌀로 추정되지만 떡은 아니다. 찹쌀로 부들부들하고 쫀득쫀득한 반죽을 만들어서 얇게 펴서 익힌 다음 그걸 돌돌 말거나 안에 새우와 같은 다른 재료를 넣어 속을 채우는 식으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낸다.


얌차는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다양한 음식이 나왔지만, 계속 먹다 보면 조리방법이나 재료와는 무관하게 맛이 다 비슷하다. 그리고 차는 반드시 계속 마셔야 한다. 입안을 헹궈주는 뜨거운 차가 없었더라면 아마 몇 입 못 먹고 느끼해서 포기했을지도. (뭔가 맥앤치즈와는 차원이 다른 느끼함.)


뜨거운 물은 계속해서 리필이 가능하기 때문에 빈 보온병의 뚜껑을 눈에 띄게 열어 놓으면 직원이 가져가서 뜨거운 물을 받아다 갖다 준다. 그렇게 받은 뜨거운 물을 찻주전자에 붓고 차를 각자의 컵에 붓고 차의 힘을 빌어 음식을 더 먹고 음식의 힘을 빌어 이야기를 더 한다. 그렇게 몇 시간을 함께 한다. 훈훈하고 따뜻하게.



따뜻한 차가 잔뜩 들어간 뱃속에서 온기가 뿜어져 나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꾸물꾸물한 하늘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지만 기분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