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자유로워지는 쪽으로

by 조설 joseol

오랜만에 경량 패딩을 입었다. 영하 10도를 웃도는 날씨 탓에 매일 두꺼운 패딩만 걸치고 다녔더니 몸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는, 다소 장황한 이유에서였다. 대신 목이 따뜻해야 몸도 따뜻해진다는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두 번 정도 휘감을 수 있는 목도리를 챙겼다. 물론 집을 나서며 조금 후회하기는 했지만.


참을 수 없는 혹한 덕에 큰마음 먹고 산 패딩은 이렇게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입고 다니는 것 같은데. 입고 있을 때는 이 두터운 옷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지 못했다. 실내에 들어와 겉옷을 의자에 걸어두면서 깨달았다. 이 무거운 옷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때 등허리까지 길렀던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벗고 나서야 옷의 무게를 아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자르고 나서야 그 머리털들이 얼마나 쓸데없이 거추장스러웠는지 실감하던 순간을 말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주변 사람들도 거기서 약간의 변주를 주었을 뿐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짧은 머리는 손질하기 귀찮다거나 얼굴이 커 보인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배제됐다. 나 역시 별다른 의심 없이 머리카락을 길렀다. 머리를 감고 말리는 일은 늘 번거로웠고, 매직이라도 하려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목이 뒤로 젖혀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때도 있었지만, 여자라면 당연한 일이라 여기며 넘겼다.


숭덩숭덩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마스크와 선글라스 아래로 정열적인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여성들을 보았다. 한 목소리로 분노를 토해내던 그 모습은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 같았다. 나는 제각각의 뒤통수들을 자주 떠올렸다. 눈을 감아도 햇빛 아래 훤히 드러난 목덜미가 선명했다. 머리를 자른 뒤 거울을 마주했을 때, 그들과 닮은 내가 서 있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었다.


한파에 경량 패딩을 입어보니 목덜미에 닿는 공기가 얼마나 차가운지, 몸이 얼마나 가뿐히 움직일 수 있는지 알게 됐다. 답답하더라도 두꺼운 패딩이 필요했던 순간이 있었던 것처럼, 긴 머리로 살았던 시간 역시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참고 견디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벗어야만 알게 되는 무게들이 있으니까. 나는 덜 따뜻해지는 대신, 더 자유로워지는 쪽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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