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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Sep 22. 2020

마음의 걸음

마음도 채비가 필요하다.

 

 그날따라 유독 생각이 났다. 

 귀국한 뒤로 되려 연락이 뜸해진 친구가 있었다. 같은 나라에 있으면 더 자주 보게 될 거로 생각했지만 막상 만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자, 언제든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번번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날은 그랬다. 문득 생각이 났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였더라? 하는 생각이 들어 별 뜻 없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어 번 들리더니 곧 익숙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지냈어? 왜 그동안 연락 안 했어. 장난 섞인 말투로 평소처럼 건넨 말에 친구는 말했다.


"내가 요즘 너무 우울해서, 괜히 전화하면 우울한 얘기만 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전화하는데 우울한 얘기 하면 그렇잖아."


 한참 취업 준비 중인 친구는 몇 번의 고배를 마시더니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는 듯했다. 이제 어릴 때처럼 덜컥 아무 일이나 하기는 겁이 나고, 눈을 낮추자니 후회할 것 같고, 눈에 차는 곳들은 면접까지는 어떻게 들어갔지만 결국 선택받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위축되었고, 이제는 친구들을 만나도 전처럼 즐겁지 않다고 했다. 누가 눈치 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고, 해야 할 공부와 써야 할 자소서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학 시절, 잠깐 일을 쉬던 때가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생계를 위해 항상 파트타임 일이라도 꾸준히 했던 터라 그렇게 오래 쉰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인턴쉽을 하느라 다니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구하지 못한 채 학기가 끝난 것이다. 처음에는 내심 '그래, 그동안 고생했으니 좀 쉬어야지.' 하는 보상심리에 기대어 여행도 다니고 친구들도 만나며 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지나가자, 점점 경제적인 부분부터 나를 압박해 왔다.

 멜버른은 집세가 비싸 숨만 쉬며 살아도 달에 백만원 정도가 빠져나간다. 그동안 줄곧 일하느라 몰랐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지 않으면 놀라운 속도로 텅텅 빈 잔고를 보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지속될 걸 모르고 초반에 아무 생각 없이 놀러 다닌 덕에 잔고는 더 빠듯했다. 당장 거리에 나앉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상황이 석 달 정도 더 지속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조급해졌다. 놀러 다녀도 괜히 내가 더 많이 내는 것 같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무직인 내게 1/n을 요구하는 친구들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당시에 한참 어울려 놀던 친구와 유독 다툼이 많았던 건 그 탓인 것 같다. 그 친구는 새로운 곳을 돌아보기를 좋아했다. 멀리 못 갈 때는 근교에 있는 새로운 카페나 음식점, 박물관, 유적지라도 찾아다니며 감탄하고 뿌듯해했다. 그 친구를 보고 있으면 마치 그런 '문화생활'을 하는 것이 여유의 상징이자 살아가는 법인 듯 보였다. 가깝든 멀든 여행과 맛을 탐미하는 데에는 돈이 들었다. 백수였던 우리는 시간이 많아 더 자주, 많이 갈 수 있었고, 그만큼 잔고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상황이 안 좋아질 수록 그래도 여유롭게 잘 지낸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괜히 조급한 마음을 숨기고 싶어, 더 열심히,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여행은 힘들고 지루한 것이 되어버렸다.



 아닌 척해도 우리는 점점 압박을 받고 있었고, 숨기려 해도 조급한 마음은 가시처럼 돋아나 서로를 찔렀다. 돌아다니는 걸음은 무거웠고, 새롭고 예쁜 것들을 보며 감탄하지만, 속으로는 다가올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필요는 없어! 라며 자신을 설득해 보아도, 어느새 작은 불안감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악몽은 잠자리를 함께했다.


 그때 나는 자신을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결론 지었다. 다들 여행을 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기분전환이 되고,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하는데, 나는 여행을 할수록 점점 스트레스가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잘 모르는 곳을 돌아다니며 매번 찾아보고 지도를 확인해야 하는 것도 번거롭고, 다음 목적지까지 걸어야만 하는 것도 싫고, 웅장한 자연을 보고도 큰 감흥이 없었다. 그냥 자연일 뿐인걸? 나는 그리 큰 감흥을 받는 사람이 아닌 걸 거야.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취직하고 돈을 벌다가 이직을 앞두고 다시 여행을 가게 됐다. '여행은 좋아하지 않아!'라고 결론 지었지만 그래도 미지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했고, 무엇보다 '지금 아니면 언제 가겠어' 하는 심리가 나를 부추겼다.

 그렇게 전에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다음 회사에 입사하기까지 있던 공백인 약 일주일간, 나는 서호주로 여행을 떠났다. 서호주는 내가 있던 멜버른에서 비행기를 타고 3~4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멜버른이나 시드니만큼 발전한 곳은 아니었지만, 시내 자체는 충분히 발전되어 있었고, 근교에는 광활한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시에 퍼스에서 머물던 친구와 만나 주변을 여행했다. 아름다운 시내 야경, 반짝이는 해변과 귀여운 쿼카가 있는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도 좋았지만, 내가 넋을 잃은 곳은 란셀린 사막(Lancelin Sand Dunes) 이다. 이곳을 표현하자면, '어린 왕자가 떠난 곳'이라 하겠다. 어린 왕자의 마지막 장면에 아무것도 없는 사막 위로 쓰러지듯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어린 시절 어린 왕자를 읽으며 내가 상상했던 그 사막.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모래로 지평선을 이루는 곳. 그곳이 란셀린이다.

 당시에 나는 그곳에 함께 간 친구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만약 자살을 해야 한다면 바다가 아니라 사막에 빠져 죽고 싶어."

 그 말을 들은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신기하네,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는구나."


 압도되는 자연 앞에 나라는 존재는 이 푹푹 빠지는 모래더미 속 먼지와 같은 존재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으로 엉금엉금 사막을 올랐다. 여느 백사장의 모래보다 가는 사막은 낮은 바람에 몸을 싣고 내 발에 쉬지 않고 둔덕을 쌓았다. 당장 이곳에 빠져 죽어도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반짝이는 별도 아닌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모래더미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더 신기하고 신비롭게 다가왔다. 햇볕에 반짝이는 하얀 사막은 지대를 수놓은 듯 고요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 후, 나는 누군가 호주 여행지를 물어보면 꼭 퍼스에 가보라고 권한다. 호주를 여행한다면 꼭 퍼스에 가봐. 그곳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사막을 꼭 들려. 아름다운 사막을 꼭 가봐. 정말, 정말 아름다울 거야.


 그 후로도 나는 많은 곳을 여행했다. 몇 번은 감동적이고, 몇 번은 힘들고, 몇 번은 즐거운 여행이었다. 왜 어떤 여행은 즐겁고 어떤 여행은 힘들기만 한 걸까? 지금까지의 여행을 돌아보며 생각건대, 여행의 묘미를 결정짓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기본은 그랬다.


 마음도 여행할 채비를 해야 한다.


 아무리 멋진 여행지에 유쾌한 친구와 함께하더라도 내 마음이 무거우면 힘들고 지루한 여행이 되고 말았다. 그건 분명 마음이 함께 여행을 오지 못한 탓일 것이다. 흔히,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내 마음은 여전히 두고 온 현실에 머물러 있는 탓이다.

 그래서 이제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마음의 채비를 함께 한다. 휴가를 다녀오는 동안 아무 문제가 없도록 일도 미리미리 해놓고, 혹시 무슨 문제가 생겨도 나를 찾지 않도록 업무를 분담하고, 여행하는 동안에도 재정에 영향이 없도록 연차를 쌓아두고, 나중에 고민스러울 것을 대비해 회사에 돌릴 기념품도 미리 알아본다. 그 무엇도 내 마음이 여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나하나 꼼꼼히.


 지금도 누군가 여행을 좋아하는지 물으면 ' 모르겠다.' 대답한다. 여행을 간다고 무지 들뜨기도, 여행을  것만으로 신이 나고 행복하지도 않다. 다만 여행은 때론 감동을 주고, 때로는 사색의 때와 사건을 제공해준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여행을 '자주 가는지' 묻는다면, 자주 가는 편이다. 하고 대답할  있겠다. 어느새 여행은 이따금씩 주기적으로 하는 일상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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