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재밌다.
약속했던 삼 년이 다가온다. 삼 년을 채우겠다는 생각으로 그간 구직 사이트는 고사하고 이력서조차 찾아보지 않았다. 삼 년 전만 해도 이직을 매해 반복했던 나인데, 이력서를 고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아, 귀찮다. 이력서를 고치고, 커버레터를 수정하고, 구직 사이트에 올리고 좋은 곳에서 오퍼가 오길 기다리며 틈틈이 올라오는 좋은 공고가 없나 찾아보고. 생각만 해도 너무 귀찮다. 이직이 이렇게 귀찮게 느껴지다니. 한 직장에 줄곧 머무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어쩌면 단순히 이직이 귀찮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도 쉬지 못하고 공고를 찾고, 또 자사 양식에 맞게 수정하고, 그런 일들이 귀찮고 피곤해서 '에이, 그냥 다니자.' 그런 것 아닐까.
AICPA를 합격 발표 후 바로 이직을 준비한다. 처음에는 분명 그런 계획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미루면 미룰수록 더없이 귀찮게 느껴진다. 더 큰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더는 미룰 수 없다.
노트북을 켜고 이력서를 찾았다. 저번 경력까지 업데이트하고 끊긴 이력서. 우선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 업데이트부터 해야겠다. 구직 사이트를 보다 보니, 내 이력서를 스크랩했던 회사들이 보였다. 지금까지 줄곧 삼 년 전 이력서를 오픈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다 불과 반년 전, 내가 가고 싶었던 회사에서 내 이력서를 스크랩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은 모집 종료한 전형인 모양이다. 복지도 엄청 좋고, 분위기도 굉장히 좋다고 들었던, 업계 최고성적에 수익성, 주가도 엄청 높은 네덜란드 회사의 한국 지사다. 저런데 가면 회사원을 은퇴할 때까지 이직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깝다. 삼 년을 채울 목적으로 그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던 게 아깝다. 이런.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보다 이번 이직은 고민할 거리가 많다. 삼십 대에 접어든 지금의 나는 이직의 최고 전성기에 있다. 원하는 회사를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나이와 경력이다. 업계나 직종을 바꿀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직종을 바꾼다 해도 갑자기 디자인을 한다던가 그런 게 아니라, 회계에서 재무관리를 한다던가, 컨설팅으로 빠진다던가, 관리 회계에서 감사로 바꾼다던가 하는 그런 종류의 직종 변경이다. 특히 업계는 다시 회계나 컨설팅 펌으로 갈 기회는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대로 쭉 관리 회계를 이어가서 7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한국이력서를 제대로 업데이트하는 건 처음이다. 직무 기술서 같은 거, 영어로만 써봤었는데. 경력직은 아무래도 직무 기술서가 필수다. 신입으로 입사할 때는 직무 기술 같은 거 요구하지 않았어서 몰랐다. 영어로는 많이 써봤다. 기본 CV 경력란에 회사명과 기간, 포지션 말고도 반드시 주요 직무를 꽤 자세하게 적도록 되어있다. 한 네 가지 정도의 직무를 나눠서 한 직무당 두 세줄씩 쓴다. 아마도 국문의 직무 기술서보다 조금 더 세세하게 쓴다. 예를 들어 카페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날씨에 맞는 매일 아침 그라인더 조정, 매장 정리 및 마감과정, 주기적인 커피 트레이닝을 받아왔는지, 재고관리는 어떻게 해왔는지를 쓰게 되는데, '재고관리'라고 쓰지 않고 'FIFO를 기준으로 한 재고 정리 및 품질 점검, 부족 재고 주문 및 Food and safety 규범에 준수한 보관 환경 체크 (온도/품질/유통기한 등)' 이런 식으로 쓴다.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부터 이렇게 해 왔다.
과거 경력은 영문 이력서를 토대로 국문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데.. 생각보다 어렵다. 영어로만 써봐서 용어를 전혀 모르겠다. 예를 들어 reconciliation. 결산 시에 빠지지 않는 부분이다. 한국어로는 뭐지? 번역기를 쓰면 '화해', '조정'이 가장 먼저 나온다. 아니 어디 로보나 화해는 아니잖아. 다시 reconciliation in accounting으로 검색한다. '대사'와 '조정'이 나왔다. 대사? 대사라니. 처음 보는 말이다. 의미로 보자면 대사가 맞는데.. 너무나 생소하다. 대사라니. 대본에 나오는 대사도 아니고 말이야. 이런 식으로 '한국어로 뭐라고 써야 하지?'싶은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fixed asset 은 직역하면 '고정 자산'인데, 요새는 많이 안 쓰는 말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requested task를 수행한다고 쓰는 것도, '수명업무 수행'이라던가.
어찌어찌 주변에 뜻을 물어가며 국문 이력서는 쓰고 나니, 영문 버전보다 꽤 짧아졌다. 아무래도 문장력의 차이다. 평소에 아무리 이런저런 글을 많이 써도, 직무 기술 같은 거 써보지 않았으니 그리 술술 써질 리 없다. 반대로 영문 이력서는 금세 업데이트 했다. 예전에 호주 법률 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시절, 구인을 위한 job description을 포함해서 이민 절차를 위한 직무 기술서 검토까지 많이도 보고 써왔으니까. 길이도 자유자재다. 네 줄로 쓰는 것도 두 페이지로 늘리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영문이라면 말이다.
좋지 않다. 이번에야말로 한국으로 가고 싶다. 국문에 조금 더 익숙해져야 한다. 구직 사이트에 업데이트를 마쳤다. 다만, 구직 사이트에 업데이트한 이력서를 그대로 제출할 일은 거의 없다. 이건 인재를 찾는 회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지 직접 제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구직 사이트에서 나의 '온라인 지원'이력은 '0'이다. 이 이력서를 보고 연락해 온 회사에 메일로 이력서를 제출하던가, 혹은 원하는 회사에 공식 사이트에서 응모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쪽이든 구직사이트에서 직접 제출하는 일은 없다.
드디어 다 썼다. 뿌듯하다. 가장 귀찮은 일을 해치워버린 기분이다. 이제 이걸 조금씩 고쳐가며 지원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저런 회사를 기웃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고, 각 회사마다 양식이나 스타일이 다른 것도 생각보다 재밌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경력직이라 그런지 '자기소개서'란이 굉장히 짧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이 아예 없는 회사도 많다. 지원 동기를 포함해 한번에 몇 자 이내로 써주세요. 정도가 전부다. 아무래도 신입 공채랑은 많이 다르다. 목표한 이직기간까지 반년, 아직 급할 건 없다. 여차하면 마음에 드는 곳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퍽 여유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