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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Jul 05. 2021

오지(Aussie) 회계사의 하루

때로는 짜증을 내야 한다.





수플레를 떠먹으며 그의 캘리포니아 생활기를 들었다. 그는 주에 하루 쉬어가며 매일 열두시간씩 일했다고 말했다. 물론 그만큼 돈은 많이 벌었지만, 캘리포니아에서 여유롭게 살기에는 빠듯할 정도였다고 했다.


“한 달에 만불(약 천만원) 정도 벌었어요. 그래도 삼인 가족이 여유롭게 살기는 힘들어요. 물가가 정말 비싸거든요. 그러다 번아웃(burnout, 장기 피로에 따른 열정 상실)된 거죠.”


과연, 미국은 한국보다 더하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의 삶이 스쳐 갔다. 한때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에 비하면 내가 살던 세상은 천국이었다.




북적이는 터미널을 지나 내가 근무하는 익스체인지 타워(Exchange tower)에 들어섰다.


“Wait! I’m in! (잠깐! 저도 탈 거에요!)”


깜짝 놀란 남자가 리프트(lift, 엘리베이터)를 잡아주었다. 큰 키에 금발머리를 가진 그는 커다란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있었다. 그와 같은 금색 털을 가진 윤기가 좔좔 흐르는 고급스러워 보였다.


“Thanks, you saved me. Is that your dog?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네요. 당신의 개인가요?)”

“No, it’s our office dog. He is our mascot. (아니요, 사무실에서 키워요. 우리의 마스코트죠)”


그가 내리고 나도 곧 12 층에 당도했다. 숨을 고르며 오피스 문을 열고 들어섰다. 8 시 28 분. 안 늦었군.


“오~ 아슬아슬했네요. 커피?”


네, 가시죠. 나는 데스크탑(desktop, 컴퓨터)전원을 켜고 동료들과 다시 아래로 향했다. 멜버른은 브런치의 도시라 하지 않던가. 그만큼 커피도 유명했고, 사람들은 언제나 커피를 마셨다. 매일 아침 커피를 사러 가는 일은 회사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과였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


우리는 잠깐 고민하다 결국 늘 가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엑슬 커피 로스터(Axil Coffee Roaster)는 인테리어도 예쁘고 커피도 꽤 맛있는 커피숍이다. 아주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모두 다른 커피 취향을 가진 우리가 합의를 보고 가장 자주 방문하는 곳이었다.


롱 블랙에 헤이즐넛 추가해주시고, 라떼 두 개랑 소이 플랫 화이트는 연하게 해주세요. 아, 아이스 라떼도 하나 주시고요. 네, 아이스크림 없이 얼음만. 그리고 커피가 나올 때까지 얘기를 나누며 기다렸다. 퇴근 시간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땡땡이치는 기분이랄까.


“Five coffees for Lia? (리아, 커피 다섯 잔 나왔습니다)”


우리는 각자 커피를 가지고 다시 리프트에 올랐다. 커피를 마시며 자료를 정리한 뒤,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는 보통 하루에 한 번, 많으면 세 번까지 있었다. 때로는 멜버른 지사만, 때로는 시드니지사와 함께 유선상으로 회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어느 회사나 그렇듯 대게는 내 업무와 관련 없는 내용이 오갔다. 굳이 들을 내용은 없는데, 또 빠지면 서운하다 말이지. 오늘은 또 대표이사의 말이 길어졌다. 아, 오전에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우리를 보며 말했다.


“멜버른 쪽은 할 일 많지? 그만 빠져도 괜찮아요. “


이런, 마음을 읽혔나. 우리는 방긋 웃으며,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고 분주하게 회의실을 나와 자리로 돌아왔다. 한 시간 좀 더 됐나. 아무래도 회의는 묘한 긴장감이 있어 피곤했다. 그제야 나는 메일을 확인하고 해야 하는 업무를 솔팅(sorting)하기 시작했다. 관리하는 사업체의 간단한 페이롤부터, 사업자등록, 은행 구좌계설, 세금 계산, 부동산관리까지 정말이지 업무는 끝이 없었다.




“호주 생활은 어땠어요?”


한참 캘리포니아의 생활고를 늘어놓던 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똑바로 눈을 쳐다보며 이야기하는 습관. 익숙하지 않았다면 퍽 부담스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음.. 듣고 보니 호주는 천국이네요. 느린 것 빼고는 다 괜찮았어요.”

“아, 외국 애들 느리죠.”

“미국은 빨랐을 것 같은데요.”


그는 어느 나라도 한국만큼 빠르지는 않을 거라며 한국의 놀라운 서비스 속도로 이야기가 흘렀다. 호주에 살다 보면 정말 답답해서 한번쯤 사리가 나오지 않을까 싶을 만큼 느리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고객사의 카드 기계를 교환하며 기존의 제품을 회수해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삼월에 휴가를 낼 계획이었던 나는 이월 초에 제품 회수를 요청했다.


“We can pick it up in two weeks. (이주 안에 회수해드리죠.)”


하지만 약속한 기간에 그들은 오지 않았다.

회수를 기다리는 기계는 늘어갔고 사무실에 쌓여갔다. 다시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아니, 왜 안 오는 거죠? 이주 안에 온다면서요.


“제가 담당이 아니라서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확인해드리죠.”

“빠르면 다음 주에 회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숨이 나왔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조정했건만, 기간이 또 늘어났다. 게다가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국 휴가 기간과 겹친 것도 모자라 확실하지 않은 저 투는 또 뭔가. 아니 왜 저리 당당해? 이런 생각에 어이가 없고 한숨이 나왔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럼 그때는 꼭 회수해 주세요. 그리고 휴가 전, 동료에게 회수 건을 부탁하고 휴가를 떠났다. 그리고 휴가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다시 은행에 전화를 걸어야 했다.


“언제 올 수 있나요?”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어갔건만, 그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Maybe in two weeks. You should wait. (아마 이주 안에 갈 수 있을 거에요. 당신은 기다려야 합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 나는 결국 소이 말하는 지랄을 하기로 했다.


“I should wait? It was supposed to be done a month ago. We have asked to pick up on Feb and that time you guys said in two weeks. And you guys never came up. We called again, and you said a week. And we waited, again. And do you know what happened? You didn’t pick it up. And now in the middle of the March, you are saying I should wait? Seriously?”


대충 나랑 지금 장난하냐는 얘기였다. 그는 매니저와 이야기하더니 다음 주 초에 가지러 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픽업을 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지랄할 걸 그랬지. 이 건으로 한 전화 대기만 여섯 시간은 됐을 터였다. 때로는 짜증이 효과적일 수 있다는 걸 이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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