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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Jul 06. 2021

불안하니 출장도 가지 말라던 그 남자는

출장이야 나야?






그와 나는 외국인의 느린 일 처리에 퍽 공감대를 형성했다. 과연 한국인 감성. 늦어도 일주일 이내에 대부분의 일이 해결되는 한국에 익숙해진 우리의 사치스러운 공감이다. 그와는 그 후로 가끔 연락하며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언제나 장난기가 넘치는 퍽 웃긴 사람이었다.


“하루에 진지한 순간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한참 그와 연락을 주고받는데, 핸드폰에 알림이 떴다. 알림에는 ‘아이폰 기기를 확인하려면 아래인증 코드를 입력하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숫자 네 자리가 떠 있었다. 새벽 두 시에 뜬 알림이었다. 이게 뭐지? 해킹인가? 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어 폭풍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설마..? 나는 차단했던 번호를 풀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알람이 떴는데, 혹시 당신인가요?’


호주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정말 지긋지긋한 인연이었다. 그는 전화를 걸어왔다. 잘 지냈어요? 안부를 묻는 그에게 나는 됐고, 본인이 맞냐고 물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태연하게 말했다.


“전에 본인 핸드폰을 공기계에 백업해놨는데, 이제 바꾸려고 하니 인증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어이가 없어하는 내게 그는 말을 이었다.


“놀랐다면 미안해요. 이렇게 연락이 올 거란 것도 예상을 못 한 건 아니에요. 뭐, 그것도 괜찮다 생각했고요.”


제정신인가. 알려줄 생각 따위 없으니 공 기계는 그냥 버리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와의 악연은 언제부터 였을까. 원래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치를 떨게 된 발단이 있었다. 당시 나는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시드니, 멜버른, 캔버라에 지사를 둔 터라 간혹 각 지점으로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입사하고 몇 개월이 지났을 때, 대표는 내게 물었다.


“시드니 한번 갔다올래? 구경도 할 겸.”


이건 뭐 거의 공짜 여행 아닌가? 하는 마음에 무척 들떴다. 그날, 나는 신이 나서 당시에 만나고 있던 그에게 곧 시드니에 출장을 갈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때 그는 뭐라고 했더라. 이제는 흐릿한 기억 속 그는 굳은 표정으로 가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당시 나의 남자관계를 의심하고 있던 그는 자신이 이리 불안한데, 출장까지 가야 하냐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내가 굳이 갈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멍청하게도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한 달 뒤, 그는 여기저기 출장을 다니기 시작했고, 그와 헤어질 때 까지 나는 출장도, 여행도 마음대로 가지 못한 채, 답답한 상황에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젠장. 이미 의심이 시작된 시점에 끊어 버렸어야 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몸서리 처지는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대체 누구에게 다른 사람을 이토록 속박할 권리가 있을까. 언젠가 그가 내 기억에서 영영 사라지기를. 바라며 불을 끄고 이불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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