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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Jul 09. 2021

회계사의 휴가는 따로 있다.

마감 후는 여행으로





회계사에게는 분기별로 일 년에 네 번의 마감이 있다. 그중에서도 상반기를 마감하는 2 월과 한해를 마감하는 7 월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해도 해도 줄지 않는 서류의 산과 끝이 없는 숫자 더미 속에 한 달을 보내고 나면 혼이 다 빠져나갈 지경이다. 호주는 연차를 쓰는데 제한이 없는 편이지만 이때만큼은 예외다. 손 하나가 아쉬운 때에 연차라니! 이때 휴가를 가면 책상이 사라져 있을지 모른다.


“저녁 뭐 먹을까요?”


서류 더미의 적막을 깨고 데이빗(David)이 말했다. 데이빗은 나의 상사로, 십 연차 시니어 어카운턴트(Senior Accountant)였다. 늘 장난기가 다분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가차 없는 사람이다.


“시켜 먹을 거죠? 저는 배만 채울 수 있으면 뭐든 좋아요.”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의 목표는 아홉 시. 두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타닥타닥. 다시 말없이 타자 소리만 들려왔다. 평소에 늘 농담으로 시작해 농담으로 끝나는 곳이지만 이때만큼은 아무도 말이 없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 내일의 야근을 줄이는 것.


반 시경 정도 더 지났을까. 띵동. 우버(Ube rEat)가 도착했다는 벨이 울리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두 사람이 배달 온 음식을 가지러 내려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어깨와 허리를 뻗어냈다. 마감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지금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든지에 상관없이 끝나는 시점이 반드시 오니까. 아마 이때쯤 모두 같은 생각을 하지 않나 싶다. 그래, 이번 주만 버티자.





3 월, 폭풍 같은 상반기 회계 마감과 함께 휴가를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마감이 끝난 직후, 별문제가 없다면 다시 칼퇴근을 할 수 있는, 그나마 좀 한산한 때가 온다. 내가 머물던 호주 빅토리아(Victoria)주에서는 일 년에 사 주간에 연차와 이 주간의 병가를 제공하고, 보통 회사에서는 연차를 이 주 정도 묶어서 긴 휴가를 떠난다. 상반기 마감이 끝난 지금이 바로 그 시기다. 나는 지난 반년간의 연차를 모아 이 주간 뉴질랜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9 월에 싱가포르에 다녀온 이후, 딱 반년 만에 가는 해외여행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큰일을 하나 마감한 후에는 여행을 갔던 것 같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지방으로 혼자 여행을 가기도 하고, 이직할 때면 그 사이에 다른 주로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반년에 한번은 여행 일정을 잡고는 했다. 보통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한 달이 되지 않았을 때, 여행계획을 세우고 티켓을 끊었다. 그러면 다음 여행이 올 때까지, 나는 과거에 내가 미래에 나를 위해 마련한 일종의 ‘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열심히 한, 열심히 할 내게 주는 보상 말이다.


“이번에는 어디로 간다고 했죠?”


“뉴질랜드요. 퀸스타운으로 들어가서 오클랜드로 나올 거에요.”


동료들은 호주의 남섬이 좋다. 퀸스타운에 가면 번지점프를 해야 한다, 유명한 온천이 있다, 등등 자신들의 경험담을 쏟아냈다. 호주의 형제국가로도 알려진 뉴질랜드는 호주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였다. 그만큼 접근성이 좋았고,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했다. 하긴, 호주에 오 년이나 살면서 뉴질랜드를 안 가본 건 나 정도이겠지.


사실 뉴질랜드는 너무 가까워서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뤄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뉴질랜드 티켓은 멜버른에서 왕복으로 삼십 만원, 정말 쌀 때는 이십 만원에도 갔다 올 수 있을 정도로 저렴했고, 나는 막 마감을 마친 삼월 초, 뉴질랜드 행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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