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 꿀벌 Jul 08. 2021

당신이 와인을  싫어한다면, 그건

서래 마을에 마얘라는 프렌치 카페가 있다. 그곳에 밀푀유와 마카롱이 유명하다는 말에, 오랜만에 소희도 만날 겸 서울까지 차를 몰고 찾아갔다.


"여기가 한국에서 가장 현지랑 비슷한 맛을 내는 곳이래!"

"누가?"

"프랑스에서 나고 자랐다는 유튜버가."


우리는 무려 한 시간 가까이 대기한 끝에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종업원은 앉은 시점부터 한 시간의 제한 시간이 있다고 짧게 안내한 후에 주문을 받았다.


과연, 마카롱은 흔히 한국에서 파는 뚱카롱과 달리 마카롱 전통의 크기와 두께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마카롱은 이래야지! 다만 한국인에 입맛에 맞춘 탓인지, 온통 초콜릿과 과일 맛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홍차 맛은 없군. 그런 생각을 하며 겹치지 않게 다양한 색색의 마카롱을 골라 포장하고 두 개를 더 골라 테이블로 주문했다.

자그마한 테이블에 더 작은 마카롱과 디저트, 골드 테두리에 포인트가 들어간 파스텔 계열의 인테리어는 커다란 샹들리에와 함께 더욱 아름다운 분위기를 뽐냈다. 과연 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였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응? 한참 둘러보던 나는 고개를 들어 친구를 보고 물었다. 호주?

"에이,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말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뿜을 뻔했다. 쓰다. 이건 필시 포터 필터(Portalfilter)를 청소하지 않은 게지. 멜버른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다 보면 이 도시가 커피에 얼마나 깐깐한지 알게 된다. 고작 알바생조차 커피를 내린다는 이유로 한 달에 한번 교육을 받아야 하며 그라인더(Grinder)의 조정부터 템핑, 추출 시간, 그리고 커피 맛이 변하는 이유까지 다양한 교육을 받는다. 커피 기계로부터 커피를 추출하는 포터 필터는 뜨거운 커피를 추출하면서 다 떨어지고 남은 커피 가루 입자가 남아 타게 된다. 탄가루는 그대로 추출되어 커피에 들어가고, 얼굴을 찡그릴 정도의 쓴맛을 연출하는 것이다.


적어도 한두 시간에 한 번은 꼭 포터 필터를 청소해야 하지만.. 커피머신이 있는 카운터를 바라봤다. 여전히 밖은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직원들은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이런 디테일은 뒷전이 되기 쉽다. 맛있는 제과점에 맛있는 커피까지 바라는 건 욕심인가.


"커피는 그립네, 음.. 와인도 그립고. 술은 참 맛있었는데."

“맞아, 너 진짜 매일 마셨지.”

“아니, 그건 네가 놀러 와서 그랬던 거지!”


소희 뿐 아니라 호주에 놀러 왔던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내가 매일 와인을 한 병씩 까더라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물론 와인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의 알코올 중독은 아니었다. 다만, 한국에서 접하기 어려운 와인의 풍미를 같이 즐겼으면 하는 마음에 누가 올 때마다, 좋아하는 와인을 하나둘 꺼내다 보니 그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호주의 주류는, 특히 와인은 아주 훌륭하다. 호주 국내에서 생산하는 와인도 물론 나쁘지 않지만, 한국에서 보기 힘든 다양한 수입산 와인을 취급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조금 큰 편의점이면 어디든 ‘주류 섹션’이 따로 있었고, 원하면 언제든 원하는 술을 살 수 있었다. 오천 원짜리부터 몇십 만원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다양한 품종의 와인을 언제나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건, 와인을 알아가기에 최적의 환경이었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 와인을 알려준 건 그 남자였다. 아직 첫 학기를 보내며, 정신없이 유학생으로 자리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학기 말, 이제 좀 수업에 익숙해졌다 싶을 때 보이기 시작한 그는 조금 그을린 듯한 피부에 긴 머리를 곱게 말아 올린, 단정한 듯 화려한 외모의 남자였다. 큰 키와 화려한 외모도 있었지만, 학기 말 프레젠테이션에서의 그를 또렷이 기억한다. 뭐랄까. 단순히 영어를 잘한다기 보다, 말을 잘하는 느낌. 아시아인 특유의 외모와 가지런한 억양을 가졌기에 유학생이라 짐작했지만, 그의 영어는 꼭 한국의 아나운서가 말하듯 가지런하고 또렷했다. 거기에 단 일말의 떨림이나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 능숙함. 첫 학기를 보내며 아등바등하던 내게는 너무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다면. 그 후, 나는 수업에 들어오면 늘 눈으로 그를 찾았다. 그러다 수업이 끝날 때쯤, 그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자연스럽게 그와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이 맞을 때 종종 같이 저녁을 먹었다.


한번은 당시 내가 근무하던 카페 옆 호텔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을 찾았다. 그는 익숙한 듯 메뉴를 쓱 보고는 내게 물었다.


“뭐로 할래요?”


당시만 해도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던 나는 온통 영어로 가득한 메뉴 앞에 무엇을 택해야 할지 몰랐다. 스테이크 종류가 이렇게 많았던가.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눈치를 챈 걸까? 그는 몸을 살짝 낮추어 나를 보며, 메뉴를 하나하나 짚으며 말했다.


“Oyster, 부채살이고요. Scotch 등심, Eye fillet 안심입니다. 선호하는 거 없으시면 Scotch 나 Eye fillet 으로 드셔보세요.”


그럼 안심으로 할게요. 그러자 그는 스테이크를 먹으니 와인도 한잔하겠냐고 물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와인에 기억은 어릴 적 부모님이 마시던 와인을 한 모금 먹고는 떫어서 뱉은 기억밖에 없던 나는 와인을 마셔본 적이 없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러자 그는 다른 종류의 레드 와인 두 잔을 주문했다. 피노 누아는 물같이 맑고 점도가 낮은 와인이었다. 찰랑찰랑 흐르고 가벼웠다.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향을 살짝 맞았다. 어라, 향긋한데? 그러고는 피노누아를 먼저 한 모금 마셨다. 어릴 적 떫은 와인의 맛을 기억하던 나는 조금 놀랐다. 향긋한 과일 향이 나는 피노 누아는 마시기 무척 편했다. 나는 놀라움을 감추며 말했다.


“이 정도면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자 그는 이번에는 멜롯을 권유하며 둘 중 더 맛있는 걸 마시라고 했다. 멜롯은 피노 누아보다 점도가 높아 조금 묵직하고 끈적해 보였다. 빙글빙글 돌리면 아름다운 바이올렛 곡선이 잔에 남아 천천히 흘러내렸다. 나는 멜롯도 한 모금 마시고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가만히 나를 보다 말했다. 


“맛있죠? 그럼 이걸로 먹어요. 멜롯을 좋아하면 나중에 시라즈도 한번 먹어봐요. 와인은 마실 일이 종종 있으니 자기 취향을 알아두는 게 좋아요.”


그 후로 나는 종종 와인을 마셨다. 여자들끼리 파티를 하면 로제(Rose)나 샴페인 같은 스파클링 와인(Sparkling Wine)을 마셨고, 회식 때도 늘 파스타나 스테이크에 와인이 함께 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몇백 불 짜리 샴페인을 따고, 누군가를 방문할 때면 항상 와인을 선물로 가져갔다. 이곳에서 와인은 사회생활에 필수적인,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또 와인은 품종, 원산지, 보관법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로 변했다. 신기하게 두어 잔만 마셔도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왔고,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 잔은 또 얼마나 예쁜지! 투명한 와인잔은 목이 길고 얇쌍하며, 아름다운 곡선을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잔에 향긋한 술, 기분 좋게 오르는 취기 덕분에 혼자 마셔도 퍽 분위기에 젖어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아, 이렇게 달콤한 술이 있다니!


그때부터 나는 시간이 날 때면 종종 와인 바와 와인 밸리를 여행하며 와인을 마셨고, 마음에 드는 와인을 만날 때면 라벨을 찍어 두고는 했다. 그리고는 아직 와인 맛을 모르는 친구가 방문하면 와인 바에 데려갔다. 그러면 맛있는 와인과 치즈 플레이트를 먹은 친구들은 그 맛에 빠져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이 찾은 와인 맛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단언컨대, 당신이 와인을 싫어한다면, 그건 아직 맛있는 와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매일 마카롱과 초콜릿에 빠져 살던 나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