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본래 혼자 쓰던 방, 혼자 지내던 공간일 터인데, 침대도 방도 커다랗게 느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허한 빈자리를 더듬을 새도 없이 내 삶은 빠르게 채워졌다. 쏟아지는 에세이와 발표, 시험과 일을 반복하며 어쩌면 일부러 더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뒤를 돌아볼 여유가 아직은 사치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때쯤 나는 카페에서 사무직으로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사실 영주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외국인 신분으로 사무직을 한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졸업을 하고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돌아가는 사람들이 허다할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고 자리는 없었다.
과연 학생 신분으로 가능할까? 싶지만 사실 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외국에서 바닥부터 시작해 알게 된 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시도 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안될 거라는 생각에 시도조차해보지 않은 일들은 결국 ‘못한 일’이 되고 내 세상에서 영원히 어려운 일로 남는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도하는 것이다. 적어도 시도를 하는 순간 불가능은 가능성으로 바뀐다. 비록 그 시작은 아주 미비할지라도.
보통 대학교 학생 보조 (Student Support) 시설이나 유학원에 가면 원하는 직종의 이력서 샘플을 받거나 직접 쓴 이력서를 검토받을 수 있다. 혹시 외국 취업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커버 레터는 반드시 현지 기관이나 믿을만한 현지인에게 검토받기를 추천한다.
호주와 한국은 이력서에 틀이 정말 많이 다르다. 특히 한국에 자기소개서와 같은 커버 레터(Cover letter)를 꼭 써야 하는데, 내가 어디서 태어나 어디서 자랐고 어떤 환경에서 자라 왔는지 소설 쓰듯이 썼다가는 낙방이다. 호주의 커버 레터는 좀 더 직설적으로 내가 왜 이 회사에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지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에 가깝다. 내 전공과 경력을 중심으로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서술하는 과정이다. 우리 집 구성원이나 내 유년기, 호주에 건너온 이유 따위에 이들은 관심이 없다. 그런 이유로 한 번 커버 레터를 써 놓으면 같은 직종의 웬만한 회사는 정말 앞에 한두 문장만 바꿔서 제출할 수 있다.
처음에는 정말 분별없이 지원했다. 물론 연락은 오지 않았다. 수많은 이력서에서 나를 뽑아야 할 이유가 뭘까. 생각한 끝에 지원한 곳이 ‘외국어를 해야 하는 일’이었다. 많은 외국인이 모여드는 이곳은 영어는 물론이지만, 한국어나 일본어를 해야 더 유리한 일이 더러 있다. 호텔 프론트(Front)나 한국계, 일본계 회사들이 그렇다. 보통 이런 회사들은 반은 현지인, 반은 외국인으로 이루어져 있고, 본사와 연락할 일이 많아 외국어를 한다는 것에서 큰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나는 일본어나 한국어가 가능한 사람을 우대한다는 곳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외국어를 우대하면서 파트타임으로 근무가 가능한 일.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을까. 한 유학원에서 연락이 왔고, 그곳에서 첫 사무직을 시작했다.
채용 과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을 꼽자면 그 면접 방식이다. 한국에서 외국계 회사의 면접을 볼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삼 개 국어를 모두 써서 면접을 봤다. 면접관은 총 네 명이었고, 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이 내게 무작위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질문 받은 언어로 대답했다. 영어로 질문하면 영어로, 일어로 질문하면 일어로, 한국어로 질문하면 한국어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질문하는 그들도 내가 신기한지 상황이 재미있는지 퍽 신이 나 보였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의 면접이 끝나고 일주일 뒤,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며 학업도 마지막 해에 접어들 때 즈음, 내 인간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동안 나는 키다리아저씨와 꽤 많이 가까워져 있었는데, 당시에 그는 졸업 후 피츠로이(Fitzroy)에 위치한 회계 전문 회사(Accounting Firm)에 다니고 있었다.
피츠로이는 예쁜 마을과 카페들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시티에서 조금 벗어난 근교답게 큰 건물이 없고, 그리스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은 아기자기한 파스텔 톤으로 지어져 알록달록 귀여운 풍경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것 모습만큼이나 훌륭한 마을 사람들의 센스는 독특하고 느낌 있는 문화와 명소를 만들었고,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여들며 발전했다.
그는 그곳에서 일하며 종종 나에게 주변 맛집이나 명소들을 소개해 주었다. 선뜻 끼기 어렵게 느껴질 만큼 유흥이 가득한 자유로운 분위기의 펍이나, 이런 마을에 이런 곳이 있다니! 싶을 정도에 전통 일식집이 숨어있는가 하면, 거리 여기저기 숨겨진 그라비티 아트를 찾아보며 걷기도 했다. 그와 보내는 시간은 내 바쁜 일상 속, 잠깐의 쉼표 같았다. 혼자서는 가지 않을 장소들,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지나쳤던 다양한 행복을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거기에서 그쳤어야 했다.
언젠가부터 떠오른 의문.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 지금이라면 구태여 확인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지키며 방관했을 그런 기분. 하지만 그 때의 내게는 그런 참을성이 없었다. 뭐든지 파헤쳐야 직성이 풀렸다. 그는 특이한 패션 센스와 예쁘장한 외모 덕에 그렇지 않아도 종종 오해를 받고는 했다. 어느 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나는 고민 끝에 운을 뗐다.
“이상한 질문일 수도 있어요. 아니라면 죄송해요. 혹시..”
말을 다 마치지 못하는 나를 보고 그는 예상한 듯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
“네?”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아.. 아니구나. 그렇게 말하고 다시 고민하는 내게 알아차린 듯, 그가 먼저 말했다.
“여자친구가 있어요.”
어쩜 안 좋은 느낌은 틀리지를 않는지. 아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저랑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 일이 없다고 떳떳한 걸까? 주에 두 세 번 씩 만나서 데이트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특별한 일 없이 만나 온종일 같이 보내는 그런 것들이 친구라는 명목으로, 아는 사람이라는 명목으로 다 괜찮아지는 걸까. 아니, 차라리 거리낌 없는 친구라면 나도 개념 치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런 분위기, 이런 기분, 이런 걸 친구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가는 와중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게.”
아아.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그냥 친절한 사람, 좋은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었을까?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걸까. 알면 하지 못할 것을, 하지 않을 것을 모르는 채로 해 버리는 게 괜찮은 걸까. 내게는 약일지라도 누구가에는 독이 아닐까. 언제가 됐든 이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친구는 한국에 있다고 했다. 벌써 삼 년이 넘은 장거리 연애. 그가 애인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건 그런 이유였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핸드폰 한번 확인하지 않았던 건, 단 한 번도 여자친구가 있는 듯한 기색조차 없었던 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그를 알고 있던 일 년이 넘는 시간 그는 한 번도 한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않으면서 연애라는 게 가능은 한 걸까.
사람 사이에 일은 그 사람들밖에 모른다 했으니, 어쩌면 그들의 관계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일지도 모르겠다. 삼 년이 넘는 장거리 연애, 앞으로도 이곳에서 쭉 살아갈 남자와 앞으로도 한국에서 쭉 살아갈 여자. 만날 수도 없고, 연락도 자주 하지 않는 사이.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 인생 살기에도 벅찬 나는 그만 신경을 끄기로 했다. 사람이든 관계든 복잡한 건 질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