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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Oct 10. 2021

“생각만큼 무서운 곳은 아니지?”

물장사라는 말이 있다. 어린 시절 매체에 비치는 모습을 통해 막연히 ‘무서운 곳’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온갖 폭력과 뒷거래가 가득할 것만 같은 말. 그렇기에 친구가 그런 곳에서 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네가? 하지만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나와 달리 그는 퍽 태평해 보였다. 


“응, 멜버른에 온 후로 줄곧 거기서 일했으니까, 벌써 삼 년 정도 됐지. 지금은 매니저로 일하고 있어.”


어? 얘는 왜 이리 태평할까. 아니,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태평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뭐 클럽이나 나이트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지. 바텐더도 많고. 하지만 호스티스를 관리하는 매니저는 좀 다른 얘기가 아니던가. 놀란 듯한 내 모습을 본 친구는 내게, 한번 놀러 오라고 말했다. 절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한 곳이 아니며,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여차하면 자기가 나를 지켜 주겠노라고 했다. 


“와 보면 오해가 풀릴 거야.”


대학교 두 번째 학기, 편입생으로 만난 후로 거의 모든 수업을 같이 듣고 그룹 과제도 같이 하면서 친해진 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뉴질랜드에서 자란 탓에 영어를 잘하고, 키는 좀 작고 한국인보다는 조금 어두운 피부 톤을 가진 그는 여자 친구들보다 말이 많고, 또 말을 재밌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심성이 착해 폐 끼치는 걸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웬만한 일에는 짜증 한번 내지 않는 친구였다. 본 세월만 벌써 일 년 반, 적어도 위험한 일을 권할 친구는 아니었다.


“그래, 한 번 갈게.”


돌아오는 토요일에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만난 안나라는 친구와 함께 그곳을 방문하기로 했다. 안나는 한국계 일본인으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혼혈인 유학생이었다. 어릴 시절을 일본에서 자랐지만, 한국어도 잘해서 안나와 둘이 있을 때는 주로 한국어를 썼다.  


“평일 저녁은 한가하니까 바에서 놀다 가.”


우리는 그러겠노라 약속하고 헤어졌다.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친구도 있으니 별일은 없겠지. 그런데, 무서운 곳이면 어쩌지? 호스티스가 뭘까? 클럽은 몇 번 가 봤지만, 사람이 곁에서 직접 서비스를 해주는 곳은 지금껏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인터넷에서 일본 호스티스를 검색했다. 이미지 속에는 파티를 가는 것처럼 기다란 드레스에 화려한 메이크업과 헤어를 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온갖 살갗을 드러내고 천 쪼가리인지 옷인지 모르는 옷을 입고 술을 따르는,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대체 어떤 곳일까?   


“혹시 이런 데 가본 적 있어?”

나는 휴대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앤디는 사진을 몇 장 넘겨보더니, '아, 친구 따라 가 본 적 있어. 아시안이 일하는 바 말이지?' 하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 타이에서 온 대학원생 여자가 교제했었다고 했다.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그녀가 돌아가면서 헤어진 건 아니지만 사실상 헤어진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녀랑 같이 갔었어. 친구가 일하고 있다고 했거든.”

그는 그런 곳은 처음이었지만 꽤 재밌었다고 덧붙였다. 자세히 물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어차피 오늘 저녁에 가면 알게 되겠지. 


“아, 그거 다 했으면 이것도 좀 해줘.”

그는 한 건축업체의 서류 더미를 넘기며 말했다. 파일 하나로는 부족해 두 개의 파일을 엮어 만든 서류의 더미. 할 일이 많은 업체인 모양이다. 파일 더미 속 유에스비를 꽂아 파일을 확인하고 프로그램에 저장된 업체의 프로파일을 확인했다. 정리할 카드 내역만 네 개. 오늘은 이것만 해도 하루가 다 가겠군. 


“이거, 서류 수집은 다 끝난 거야?”

“아마 다 보내주긴 했을 탠데, 없으면 일단 없는 데로 하고, 이상한 거 있음 전화해서 확인해 봐.”


아직 확인을 안 했다는 말이군.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세무 업무를 주로 맡아 하는 이곳은 분기마다 할 일이 넘쳐났다. 인턴을 하던 봄은 그나마 분기별 마감만 있었기에 일을 배울 시간이 있었지만, 다음에 학생들은 일을 배울 틈이 있을까? 


기업은 규모에 따라 일 년에 한 번, 두 번, 많게는 네 번까지 세금 신고를 하게 된다. 매년 칠월 일 일에 새로운 회계연도가 시작되는 호주에서는 유월, 칠월, 팔월이 가장 바쁘다. 모든 개인과 기업들이 회계연도를 마감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쿼터로 세금신고 하는 기업들만 삼 분기 세금신고를 진행하는 봄과 가을에는 비교적 일이 많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인턴을 준비할 때는 시기를 잘 골라야 한다. 보통 바쁠 때 인턴을 많이 뽑는 만큼 기회도 많지만, 그렇게 되면 잡무만 하다 끝나기 일쑤다. 실제로 Account Payable(지불 계정)이나 Account Receivable(수금 계정)만 담당하다 끝나는 친구들도 있고, 온종일 인보이스만 처리하는 친구들도 있다. 삼 개월이 지나면 사라지는 직원에게 모든 프로세스를 하나하나 알려줄 시간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실제로 저 계정들만을 담당하는 직무가 존재하니까. 나도 여름에 인턴을 했다면 종일 북킵핑(Bookkeeping, 부기)만 하다가 끝나지 않았을까. 


아, 영수증이 끝이 없다. 왜 요즘 같은 세상에 굳이 현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는 걸까? 핸드폰에 모든 카드가 들어 있는 이런 편리한 세상에 말이다. 카드는 프로그램과 연동하면 사용하는 즉시 알아서 프로그램에 기록된다. 어디에서 썼는지, 어떤 계정인지 대부분 알아서 입력되고, 혹시 잘못 들어간 계정만 나중에 reconciliation(계정 조정)만 해주면 된다. 그 많은 거래를 일일이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문제는 현금이다. 현금 비용만큼은 프로그램이 알아서 기록해주지 않는다. 큰 기업은 대부분 회사 내부의 회계 부서를 가지고 있지만,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은 대부분은 그런 부서를 따로 두지 않고 외주를 맡긴다. 한국도 호주도, 마찬가지다. 그런 기업들의 경우, 세무 신고를 위한 절차는 더욱 길어진다. 기본적인 부기부터 영수증 처리, 확인, 계정 분리까지 다 우리의 몫이다. 


“이제 갈 시간이야. 내일마저 해.”


눈이 뻑뻑하다. 왜 밥 먹고 쇼핑한 영수증까지 다 보내는 걸까. 양심적으로 구분은 좀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갈아신은 구두를 가방에 넣고 트램 정류장으로 향했다. 북쪽으로 시티까지 한 시간. 인턴이 된 시기도, 담당 회계사도 다 좋은데 너무 멀단 말이야. 보통 풀타임 인턴을 하던 곳에서 오퍼를 받아 일자리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이렇게 멀어서야. 다닐 수가 없다. 여덟 시 반에 시작해서 다섯 시 반에 끝나는 일자리에 가기 위해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는 일상은 도저히 사양이다.


트램을 갈아타고 멜버른 시티의 서쪽 끝, 팔리아먼트 스테이션(Paliament Station) 부근에 도착했다. 시티의 동쪽과 달리 서쪽은 대부분 오래된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조금은 부패된 듯한 상아색을 띤 건물 들. 그 건물의 삼층에, 그곳이 있었다. 일본식 유흥주점. 밤 여섯 시에 시작해 새벽 두 시에 문을 닫는 남자들의 밤, 호스티스가 기다리는 곳.


막상 들어가려니 조금 겁이 났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내가 이런 곳에 와도 되는 걸까? 아니야. 괜찮을 거야. 안나는 먼저 도착해, 바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래, 올라가자. 나는 조금 어두운 복도를 지나 리프트를 눌렀다. 리프트는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이곳에 리프트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속력이 제각각이다. 눈 깜짝할 새에 삼십층에 도달하는 게 있는가 하면 이렇게 삼층을 올라가는 데에도 온갖 생각을 할 만큼 천천히 움직이는 곳도 있었다. 곧이어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열려있는 오른쪽 유리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갔다. 


“おはようー。(좋은 아침)”

친구는 조금 신이 난 모양새로 인사를 건넸다. 아침이라니, 지금은 저녁이잖아. 그렇게 말하는데 웃음이 났다. 뭐랄까. 약간의 안심과 낯선 곳에서 본 친구의 모습이 어색해서 웃음이 났다. 뭔가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여기서는 다들 이렇게 인사해. 출근 시간은 밤이지만 일의 시작이니까.”


아, 그래? 그렇게 말하며 나는 친구의 안내에 따라 바에 앉았다. 음료를 고르라는 말에 메뉴판을 살폈지만 나는 일본 술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럼 우메슈(일본식 매실주)를 마셔봐.”

그렇게 말하며 그는 능숙한 솜씨로 양주잔에 우메슈를 만들어 냈다. 커다란 얼음이 가득한 우메슈는 꼭 음료수처럼 달았다. 술맛은 거의 나지 않았다.


“맛있네? 이건 뭐야?”

나는 '이모슈'라는 걸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감자로 만든 술이라며, 한국에 소주 같은 거라고 덧붙였다. 감자로 만들어서 소주보다는 알코올 향이 덜 날 거야. 달지는 않지만.

그가 추천하는 음료를 하나, 둘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기다란 드레스를 입은 화려한 이목구비의 여자가 다가와 인사했다. 


“코우키 군 친구?”

아 네, 안녕하세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웨이브로 세팅된 머리, 화장은 수수하지만, 워낙 이목구비가 뚜렷해 화려한 분위기에 그 여자는 아무 특징 없는 단색 드레스를 입고도 가느다란 팔과 허리, 풍성한 가슴라인이 드러났다.

“인사해, 마마(ママ, 마담)인, 아키코 상.”

그녀는 가식 없는 말투로 그와 말장난을 주고받으며 그의 학교생활을 물어왔다. 전혀 당황하거나 불편한 기색이 없는 그녀는 어떤 걸 물어도 태연하고 천진한 말투로 능숙하게 대답했다. 예쁘다기보다는 우아하고 단단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밤 여덟 시가 되자, 하나둘 손님이 찾아왔다. 단체도 있었고 개인도 있었지만 모두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 공간 자체에 'Room(방)'은 하나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두 테이블과 소파로 이루어진 열린 공간이었다. 손님 옆에는 항상 여자아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밝은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눌 뿐, 눈살을 찌푸릴 만한 성희롱이나 과도한 스킨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생각만큼 무서운 곳은 아니지?”

그는 웃으며 말했다. 과연, 내가 검색한 이미지와 똑같은 복장을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나도 한국 드라마를 봐서 대충 어떤 생각이었을지 알아. 일본에서도 그런 곳이 있긴 하지만, 이게 보통이야. 그는 덧붙였다. 


짧게 본 세상. 겪어보지 않은 세상에 갖고 있던 선입견이 있었다. 세상에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이 있다. 겪어보기 전에 쉬이 단정 지어버리지 말기를. 그렇게 내 시야를 스스로 좁히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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