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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꿀벌 Dec 26. 2021

하늘 나라에 있는 카페 같은 느낌?

산을 오르며 만난 사람들


테카포 호수는 커다란 호수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도착할 때쯤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티를 지나온 커다란 버스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곧장 예약해준 호텔을 향해 걸었다. 퀸스타운보다 더 작고, 조용하고, 휴양지라기보다 이름 모를 작은 시골 마을 같았다. 


호텔을 예약하기 위해 리셉션에 들어섰다. 키 큰 흑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아무리 봐도 뉴질랜드 태생은 아닌데, 이런 시골 마을에도 워킹 홀리데이를 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체크인을 위해 차례를 기다렸다. 

 

"Have you made a reservation?"

"Yeah, I've booked a room."


그리고 그는 무언가를 달라고 했는데, 나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파스 포드? 아이디? 아, 여권을 말하는 건가. 


"Do you mean passport? 旅券ですか?(여권이요?)"


일본인 특유의 えーと、같은 추임새, 일본인이 분명했다.


"そう!旅券! 日本人かなと思ったんですけどね。(맞아요! 여권! 일본인일까 생각은 했는데 말이죠.)”

"일본인 아니에요, 한국인입니다."


그렇게 얘기하며 나는 여권을 내밀었다. 수속을 처리할 동안 간단한 잡담을 나눴다. 그는 예약한 방의 열쇠를 주며 간단하게 위치를 설명했다. 


"아마 찾기 어려울 거에요. 데려다줄게요."


내가 묶는 방은 호텔 로비와 다른 별채에 있었다. 단층의 별채가 쭉 늘어선 곳, 언뜻 보기에 펜션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내부는 호텔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짐을 풀고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아직 대낮이었지만 부슬부슬 비도 오고 있었고, 장시간의 이동에 지쳐 있었다. 


한숨 잘까. 


하지만 지친 몸과 달리 말똥말똥한 정신은 나를 잠들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잠자리에 드는 대신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한국에 남은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원에 진학했다. 유학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귀국 후 취직하는 길을 택했다.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호주에 평생 머물기를 희망하는 사람과, 아직 젊고 길이 많아 길을 정하지 않은 채로 걷고 있는 나 같은 사람. 


대학을 졸업할 때, 나는 모두와 같은 갈림길에 섰다.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호주에 남을 것인가? 다른 나라로 떠날 것인가? 나는 당시에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을 했다. 한국, 호주, 미국, 일본에 모두 이력서를 내고 가장 먼저 연락이 오는 곳에 남기로 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연락은 왔지만 결국 가장 먼저 호주에 취직이 결정됐고, 남는 길을 택했다. 사실 머물고 있는 이 나라에서 가장 먼저 취직이 결정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하고 싶은 거 제일 많이 하고 사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요?'


어느 순간, 호주와 한국과 일본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나는 그런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사람.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 

이런 내가 하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꽤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애초에 환경에 휩쓸리지 않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훨씬 더 많은 선택을 하고 훨씬 더 많이 휩쓸려서 여기까지 왔을 터였다. 


모두가 대학원에 진학할 때, 나 역시 대학원에 진학해야 하나 고민했고, 모두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나 역시 돌아가야 하나 무진 고민했다. 어쩌면 내 환경이 아주 조금만 더 녹록했다면, 혹은 학비가 몇만 불이 아니라 몇천 불이었다면, 나중에라도 별 생각 없이 대학원에 진학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데에 질려 있었고, 몇만 불이나 하는 학비를 지불할 만큼 배우고 싶은 분야는 없었다. 대신 호주에서 일을 시작했고, 아무 생각 없이 대학원에 진학했다면 배울 수 없었을, 귀중한 경험을 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에 나는 또 다른 갈림길이 도래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십 대에 고민이 많은 건, 할 수 있는 선택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나는 자는 걸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아직 하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오로라를 볼 생각으로 왔는데, 못 볼 수도 있겠어. '


오로라를 보든 말든 밤까지는 이 고요한 호수에 머물러야 했다. 별다른 조사를 하지 않았던 터라 호텔 로비에서 정보를 얻기로 했다. 현지 호텔 로비만큼 관광지를 잘 알고 있는 곳도 없다. 


"저녁까지 할 일이 없는데, 여기서 무얼 하면 좋을까요?"

"보시다시피 평화로운 호수 마을이라 달리할만한 액티비티는 없어요. 혹시 커피 좋아하세요? 그러면 여기서 일 킬로 정도 거리에 작은 산이 있는데, 그 위에 유명한 카페가 있어요. 커피도 유명하지만, 경치가 정말 좋아요. 등산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한번 올라가 보세요. 전망이 아주 예뻐요."


그는 아래에서 약도를 꺼내 가야 할 길을 그려주며 말했다. 과연, 이 정도면 저녁까지 충분한 시간 때우기가 될 법했다. 몸을 움직이면 잡념이 사라진다고도 하지 않던가. 등산은 싫지만, 커피는 아주 좋아해요. 달리 할 일도 없으니 다녀올게요. 나는 펄럭이는 실크 소재의 옷을 입고 하얀 스니커즈를 신은 채로 그려준 길을 따라 걸었다. 핸드폰과 약도만 들고 터벅터벅.

그리고 곧 생각 없이 등산에 나섰음을 후회했다. 걸을 만큼 걸었다 생각했는데 이제야 앞으로 몇 킬로를 오르면 된다는 표지판이 등장한 것이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난 이미 슬슬 지쳐가는데. 그래도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조금만 더 가면 된다니 금방 오르겠지. 슬슬 걷다보면.. 


하지만 눈앞에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수직으로 보이는 산길이 있었다. 아니, 이건 뭐 하늘로 올라가는 길인가? 가파른 경사와 높은 나무에 가려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아아. 이 가파른 흙길을 하얀 스니커즈를 신고 올라야 하다니. 


얼마나 올랐을까, 나무가 사라지고 초원 같은 길이 나왔다. 여전히 올라갈 길은 끝이 없어 보였다. 여행에 맞춰 구입한 따끈따끈한 스니커즈는 어느새 먼지 구덩이를 뒤집어쓰고 누리티티한 색이 되어 있었다. 아.. 이거 맞나? 헉헉 거리며 올라가는데 같은 버스에 타고 같은 호텔에 머물러 계속 동선이 겹쳤던 남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내 표정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ここ抜けたらすごくきれいです。頑張ってください。あと少しです。(여기를 벗어나면 엄청 예뻐요.  힘내세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日本の方?(일본인?)"


갑작스러운 일본어에 조금 놀란 나는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부리부리한 인상이 분명 중국인일 거라 생각했는데, 일본인이었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유독 테카포 호수에는 일본인이 많았다. 여행객도 많았지만, 꽤 유명한 일식집이 자리하고 있는 탓에 워킹홀리데이로 일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외국에 나오면 많은 한국인 보다 더 많은 일본인, 그보다 더 많은 중국인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다섯 배는 되는 인구를 가지고 있으니,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나는 선천적으로 폐활량이 적었다. 딱히 병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릴 때 간호사가 분유를 잘못 먹여 많이 아팠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폐활량 검사를 하면 일반인에 70%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유산소 운동을 조금만 해도 금방 숨이 가빠졌다. 이를 핑계로 평소 운동을 극도로 피한 탓에 폐활량은 언제나 제자리걸음. 그 때문인지 등산을 할 때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숨은 이제 막 전력 질주를 마친 사람마냥 몰아 쉬게 된다. 보이는 사람마다 나한테 힘내라며 따스한 말을 건네는 건 아마 이 때문이다. 심지어 벤치에 앉아 쉬던 노부부도 내게 말을 건넸다.


"You are almost there! You can do it!"


아니, 저 정말 멀쩡해요. 숨이 좀 찰 뿐이라고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숨이 가빠, 간신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내가 부축해 드려야 할 것 같은 분들에게마저 안쓰럽게 보이는 건 좀 서글프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동양 여자를 위로할 만큼, 이곳은 따듯했다. 


많은 사람의 응원을 받으며 도착한 정상에는 아스트로라는 이름의 하얀 카페가 있었다. 정말 산꼭대기에 위치한 그곳은 어디가 경계인지도 모를 광할한 자연이 내려다 보였다. 꼭 이륙하는 비행기에 있는 듯한 기분. 나는 카페에 들어가 따듯한 음료를 주문했다. 카페를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측은한 마음에 물었다. 그럼 너희는 매일 이 길을 오르는 거니? 


"아, 우리는 차를 타고 통근해. 사실 반대 쪽에 도로가 있거든."


아, 그래. 그럼 그렇지. 커피를 받아들고 나와 사진을 찍었다. 산 정상은 스산했고, 바람이 불었다. 얼른 찍고 들어가지 않으면 얼어 죽을 지경. 하얀 돌로 만든 테이블에 커피잔을 올리고 사진을 찍었다. 흐린 날이라 그런지 곳곳에 구름이 가득해, 꼭 하늘에 올라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늘나라에 카페.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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