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벗어나기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역에 내리면 출구로 나오기 전, 커다란 서점이 하나 있다. 알파벳과 숫자로 꼼꼼히 분류된 그 서점은 늘 새롭고 다채로운 책들로 가득하다. 기대되는 신간이라도 나올 때면 복도에 커다랗게 자리를 잡고 각종 홍보 문구로 치장한 자태를 뽐낸다. 늘 가는 곳은 J 언저리. 그곳에 서서 알록달록한 표지로 치장한 책을 고른다. 아무 페이지나 펴서 한두 문장을 읽고는 마음에 들었는지 자리를 잡고 앉아 첫 페이지부터 읽는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줄곧 글에서 눈을 떼지 못해 피로감이 밀려온다. 그럼 잠시 갈피 끈을 끼우고 책을 덮는다. 눈을 감고 잠시 동안 요리조리 눈알을 굴리면 다시 눈은 생기를 찾는다.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다시 이어갈 동력을 확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갈피. 눈이 피로하면 책갈피를 꽂듯이, 일상에 지치면 여행을 간다. 나의 일상을 잠시 덮어두고, 다시 나아갈 동력을 회복한다. 잠깐 휙, 다른 곳을 둘러보며 눈의 원근법을 확인하는 시간 말이다.
지난 3월, 코로나의 여파가 오세아니아로 밀려들기 직전에 나는 휴가를 냈다. 세금을 다루는 일의 특성상, 연말 연초는 한참 밀려드는 일에 정신이 없이 바쁜 날을 보낸다. 막 밀린 일을 해치웠을 무렵, 다시 한바탕 주기가 시작되기 전에 휴가를 낸 것이다. 뉴질랜드는 호주 바로 옆에 위치한 이웃 나라였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5년이 다 되도록 방문할 일이 없었다. 한국에 돌아가기로 하고 나서야,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뉴질랜드를 여행하리라 결심했다.
퀸스타운 공항에 떨어졌을 때, 여기가 사람들이 말하는 뉴질랜드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공항에서는 푸릇푸릇 한 산맥이 보였고, 바쁜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한적한 여유가 곳곳에 깃들어 있었다. 작은 캐리어를 끌고 버스에 올라 풀을 뜯어먹는 양 떼를 구경하며 퀸스타운 시내로 향했다.
내릴 때를 놓칠라, 지도를 확인하며 흘끔흘끔 풍경을 훔쳤다. 한 시경 정도 지나자 이국적인 마을이 보였다. 예약한 숙소에 짐을 맡기고 마을 관광이라도 할 요량으로 시내를 사부작사부작 걸었다. 퀸스타운의 시내는 그리 붐비지도 그리 한적하지도 않았다. 맛있는 집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가 하면 모퉁이를 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거리를 구경하며 걷다 보면 작은 시내는 금방 동이 나, 바다와 항구가 보였다. 소금기 섞인 달콤한 감자와 와인 향이 어우러져 기분 좋은 풍미가 일었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낮부터 술을 마셨다. 탁 트인 항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 서로 관여하는 일이 없었다. 다들 제맛에 즐기기 바빴다. 바다 한편에서는 요트를 타고 서핑을 하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술을 마시고, 저쪽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장난감 부메랑 같은 것을 던지며 놀았다. 근심과 걱정일랑 없는, 히피의 도시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아 홀로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유명한 관광지인 스카이라인에서 뷔페를 먹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여행을 왔으니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나를 부추겼다. 그렇게 밤까지 돌아다니다 기진맥진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여독에 근육통까지 더해져 온몸이 뻐근했다. 캡슐 호텔에 몸을 뉘고 아침 늦게까지 기절하듯 잠을 잤다.
다음 날 눈을 뜨니 소곤소곤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다들 여행지를 둘러볼 준비를 하는 듯했다. 뒤늦게 일어나 대충 물 세수를 한 뒤, 부랴부랴 햄버거집을 찾았다. 어제 길게 늘어진 대기 행렬을 보며 다음날을 기약했었기 때문이다. 제법 늦게 일어났지만, 많이 붐비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표 메뉴인 햄버거 세트를 시키고 가게를 구경했다. 여기저기 유명한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찍은 단체 사진과 사인들이 빼곡히 벽면을 메우고 있었다. 한창 먹고 있는데 관광객들로 보이는 한국인들이 들어왔다. 이곳은 예상대로 꽤 유명한 식당인 모양이었다. 햄버거를 먹으며 갈 만한 곳을 검색했다. 처음부터 티켓과 숙소, 몇 가지 예약이 꼭 필요한 대표 관광 코스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소망도 있었고, 무엇보다 관광하기에 급급해서 정작 좋은 여운은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너덜너덜해져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남은 콜라를 마시며 버스에 올라 또 다른 관광지를 둘러보려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삼 일째가 되자, 이제는 퀸스타운에서 더할 일을 찾을 수 없었다. 워낙 해양 스포츠 같은 곳으로 유명한 곳인데, 하나도 알아보지 않고 온 탓에 펄럭이는 옷들밖에 없는 대다, 혼자 번지점프를 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덕분에 한가로운 한때를 얻어, 근처 카페에서 요깃거리를 사 들고 터덜터덜 걸었다. 짧은 도시는 나를 금세 항구로 데려다주었다. 파란 하늘이 청록색 바다를 닮아 반짝였다. 종종 갈매기가 찾아와 나를 훑었지만 나눠줄 빵조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금세 날아가 버렸다. 편안했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해야 할 것도 없었다. 그제야 조금,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의무도 없는 하루,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는 태평한 한량이 되었다. 지금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낮부터 맥주를 마시며 바다를 보고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의 일상 속, 나는 스쳐 가는 아무개라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는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그때서야 부담 없이 바나나보트를 예약하러 갔지만, 예약은 이미 다 차 있었다. 이제야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할 만큼 자유로워졌는데! 하루만 더 있었다면 나도 잠시나마 히피가 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