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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Sep 09. 2020

아릿한 감정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남매의 여름밤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사진제공=그린나래미디어

*이 글에는 ‘남매의 여름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봄꿈, 여름밤, 가을빛, 겨울나무. 무릇 계절이 단어에 수식으로 붙으면 그 자체로 야릇한 정취를 자아낸다. 그 단어가 눈앞에 빚어지고, 향이 달려들고, 살갗으로 파고든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남매의 여름밤’은 첫 신을 마주하기 전부터 달큼하고 끈적한 공기가 파고들었다.     


옥주(최정운 분)와 동주(박승준 분) 남매는 아빠(양흥주 분)의 다마스에 단출한 이삿짐을 싣고 어디론가 향한다. 길거리에서 짝퉁 운동화도 팔고 용달 일도 겸하는 아빠는 생활고에 쪼들리는 터라 당분간 할아버지(김상동 분) 집에서 신세를 질 요량이다.      


할아버지의 오래된 2층 양옥집은 마당이 우거진 텃밭이다. 옥주는 2층 방에 핑크색 모기장으로 자신의 영역 표시를 하면서 동주를 밀어낸다. 마침 친구 집에서 얹혀살며 이혼을 고려하던 고모(박현영 분)도 찾아들고 함께 지내게 된다. 옥주는 살가운 고모에게는 선뜻 잠자리를 내어준다. 무심히 할아버지를 보던 아빠는 옛 기억이 나서 여름 방학이라 늦잠을 누리는 동주에게 등교하라며 장난질을 친다.      


할아버지의 생일이 다가온다. 가족들은 소박한 생일상과 함께 따뜻한 축하를 전한다. 옥주는 생일선물로 드린 페도라를 할아버지가 즐겨 쓰자 빙긋 웃음이 난다. 할아버지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아빠와 고모는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는 문제로 의논하던 끝에 할아버지의 집을 내놓기로 결론짓는다.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여름의 끝에 다다른다. 이따금 남매간에 술자리를 가졌던 동네 슈퍼 평상에서 아빠가 고모에게 말한다. 나는 찬바람이 불면 코끝이 찡해진다고.      


‘남매의 여름밤’(2019)은 윤단비 감독의 작품으로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시민평론가상, 넷팩상, KTH상을 수상했고 제49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는 밝은미래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의 감칠맛은 아역 배우들의 꾸밈없는 연기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택시 안 어린 남매의 모습은 슬픔으로 촉촉하다. 신중현의 ‘미련’은 임아영, 장현, 김추자의 버전으로 삽입되었다. 특히 늦은 밤, 옥주가 오디오로 ‘미련’을 듣는 할아버지를 발견하고는 물러앉아서 노래를 듣는 순간 관객도 함께 애잔한 노랫말에 휘감긴다.   


삶의 오랜 흔적이 누각된 할아버지의 2층 양옥집은 제3의 주인공이다. 경계를 짓기도 하는 중문이 딸려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결혼사진 액자가 있고, 손길에서 멀어졌던 자전거와 축구공이 있고, 손때 묻은 재봉틀이 있다. 낡은 선풍기가 탈탈탈 돌아가고 모기향이 피어오르는 집에서 가족들은 담금술을 홀짝거리고, 콩국수와 잡채, 비빔국수, 센베이를 먹고 텃밭에서 갓 따온 고추와 방울토마토, 포도를 먹는다. 이 작품 속에서 집은 공간적 배경을 넘어서서 하나의 캐릭터로 숨쉬고 있다.      


초등학생 동주는 커다랗고 포근한 봉제 인형과 함께다. 극 중에서 단 한 번의 언급도 없지만 이혼 후 따로 사는 엄마가 사준 그래서 애착이 깊은 인형이 아니었을까 짐작했다. 동주는 누나에게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지만 외출하는 누나의 손에 방울토마토를 살뜰히 챙겨 주고, 싸움 후 사과하는 누나에게 언제 싸웠냐며 너스레를 떠는 잔정이 많은 소년이다. 중학생 옥주는 빈자리가 각별하다. 짐이 빠져나간 반지하 집을 찬찬히 살펴보는 눈길에 묻어난다. 옥주는 쌍꺼풀이 갖고 싶고, 연락이 뜸한 남자친구가 신경 쓰인다. 어른들이 마시는 캔맥주도 찔끔 마시고, 어른들이 할아버지 몰래 집을 내놓은 것에 화가 치민다. 옥주는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 문득 소파를 보다가 할아버지 생각에 끅끅 눈물을 터뜨리는 속정이 깊은 소녀다.     


‘남매의 여름밤’이란 제목처럼 옥주와 동주 남매, 아빠 병기와 고모 미정 남매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에게 닿아 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어린 남매와 성인 남매는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극 중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부재한다. 옥주와 동주처럼 어머니에 대한 감정의 온도 차도 존재한다. 그러나 어린 남매도 성인 남매도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꿈인지 기억인지 아득한 경계가 짙은 그리움을 머금는다.      


윤단비 감독이 품은 서사는 담박하지만 농농한 여운을 남긴다. 할아버지보다 앞서 등장했던 텃밭의 의자가 할아버지가 떠난 후인 마지막 신에도 덩그러니 등장할 때 가슴이 먹먹해진다. 눈에 밟히는 아릿한 감정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작품이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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