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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Dec 21. 2020

새록새록 돋아나는 감정들

벌새

영화 ‘벌새’ 스틸컷./ 사진제공=(주)엣나인필름

*이 글에는 ‘벌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4년 봄, 스무 살의 나는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글을 쓰고자 모인 이들 속에서 잔뜩 움츠러들었다. 여름, 태어나서 이사가 잦았던 6년이란 시간을 걷어내면 스무 살까지 살았던 창신동에서 다른 동네로의 이사를 앞두고 있었다. 찜통더위 아래 부모님과 갔던 신설동 가구 거리에서 북한의 김일성 사망 호외를 받았다. 도통 실감이 나지 않는 죽음이었다. 가을,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비할 데 없는 참담한 사고였다. 겨울, 나는 맥주 500cc의 취기에 힘입어 첫사랑에게 대찬 고백을 했다. 그리고 실연의 감정이 얹힌 가요들에 심장을 박은 채로 지냈다.

나는 성년이 되었음에도 미성년인 소녀의 마음으로 서성거렸다. 신작로로 나서지 못하고 후미지고 비좁은 골목길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나를 둘러싼 나라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 싶다. 1994년은 그렇게 선명하다.     


1994년 서울. 중2 은희(박지후 분)는 강남 8학군에서 학교를 다니지만 공부에는 별 뜻이 없다. 교실에서 그런 자신을 향해 밉살스럽게 두런대는 이야기도 흘릴 수 있을 만큼 은근 강심장이다. 또한 담임이 ‘담배, 연애, 노래방’으로 요약한 날라리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은희는 심히 어색한 포즈로 담배를 피우고, 손만 잡아도 절로 웃음이 나는 남자친구와 연애 중이고, 이따금 노래방에 가는 은근한 날라리다.     


은희는 부모에게 자신을 개 패듯 때리는 오빠(손상연 분)를 이르지만 부모는 둘이 싸우지 말라는 말로 폭력을 묵인한다. 가부장적인 아빠(정인기 분)는 공부를 못해서 강북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언니(박수연 분)는 부끄럽고 공부를 잘하는 오빠는 자랑스러운 존재이기에. 엄마(이승연 분)는 외도를 알아차리고도 은희에게 아빠가 무슨 옷을 입고 갔냐는 맥없는 질문만 던진다. 급기야 아빠는 폭언으로, 엄마는 스탠드로 일격을 가하며 폭발한다. 다음날 사이좋게 TV를 보며 키들거리는 부모를 보면서 은희는 자신의 가족이 콩가루 같다.      


은희는 첫사랑 진행 중이다. 남자친구 지완(정윤서 분)에게 담백하게 먼저 키스를 제안하고, 잊지 못할 첫 키스의 순간을 만들고, ‘김은희♡김지완 120일 기념송’ 카세트테이프의 커버를 만드는 일부터 멘트, 곡 녹음까지 해낸다. 그리고 콜라텍에서 만난 1년 후배 유리(설혜인 분)는 X언니, X동생을 하자며 은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온다. 지완은 엄마에게 무력하게 끌려가면서, 유리의 1학기 진심은 2학기 변심으로 마감되면서 은희의 내밀한 관계는 모두 끝을 맞이한다.

은희에게는 다른 중학교에 다니는 절친 지숙(박서윤 분)이 있다. 은희는 만화를 그리는 것이 좋고, 지숙은 엄마가 시험을 잘 보면 사주는 캘빈클라인이 좋다. 말수가 적은 은희는 지숙 앞에서는 수다 꽃을 피운다. 트램펄린에서 뛰어오르는 순간에도, 한문학원에서 함께 수업을 듣는 중에도. 툭하면 때리는 오빠가 있는 두 소녀는 속 깊은 대화도 하고, 절친이기에 알 수 있는, 할 수 있는 충고도 하고, 다투기도 토라지기도 하지만 서로가 더없이 소중하다.

은희가 만나는 어른들 중에서 진짜 어른은 한문학원 영지 선생님(김새벽 분) 단 한 사람 같다.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즉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능히 몇이나 되겠는가’라는 뜻의 특별한 물음을 던진다. 민중가요 ‘잘린 손가락’의 툭툭 치고 들어오는 가사로 지난한 삶을, 함부로 재단해서 동정해서는 안 될 삶을, 자기 자신을 좋아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의 크기를 일깨운다. 은희로 하여금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게끔, 즉 마주하게끔 한다.

‘벌새(House of Hummingbird)’는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제23회 부산영화제 넷팩상, 제69회 베를린영화제 제네레이션 14+ 대상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25관왕의 영예를 차지했다. 촘촘하게 짜여진 각본과 찬찬한 연출로 휘황한 작품이다. 인물을 품는 촬영과 장면을 품는 음악도 인상적이다. 박지후는 14살 소녀 은희로 영화에 짙은 여음을 남긴다. 범상한 듯해도 비범한 은희의 표정, 손짓, 몸짓을 빚어낸다. 박지후의 걸음걸이로도 은희의 감정이 그려진다.     


138분의 러닝타임이지만 날라리 색출, 이름이 재미있는 우롱차 등 웃음 끝이 살아있는 장면들이 포진해 있다. 특히 지완의 엄마가 상가에서 떡집을 하는 부모를 둔 은희를 방앗간 집 딸 운운하며 삼자대면하는 장면은 재미나다. 아침 드라마에서 익숙한 장면도 성장 영화로 옮겨 놓으니 신선하다고 할까. 슬픔을 자아내는 장면들도 뚝뚝 흘러내린다. 은희가 자신의 집인 1002호가 아니라 채 다다르지 못한 9층, 즉 902호 앞에서 울부짖는 순간, 술에 취해서 밤늦게 불쑥 찾아온 외삼촌의 처연한 눈빛, 은희가 우연히 마주친 엄마를 애끓게 쫓는 순간, 거실에서 고속도로 휴게소용 뽕짝 버전의 ‘여러분’에 맞춰서 은희가 방방거리는 순간들이 그러하다.

은희는 사랑에 허기진 소녀다. 그래서 수술 후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침샘에서 제거한 혹의 행방을 궁금해 한다. 사실 은희에게 혹은 각별했다. 아빠가 자신을 향한 걱정에 끅끅거렸고,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영지 선생님의 격려를 받았고, 병실에서 애기로 예쁜이로 이쁨을 받았으니까. 영지 선생님 덕분에 은희는 한줌 희망이 깃든 상상화도 그릴 수 있게 된다. ‘나중에 만화를 그리면 선생님을 캐릭터로 넣을 거에요. 머리카락이 짧고 안경을 낀 괴짜 캐릭터로. 제 예감에 독자들은 선생님을 많이 좋아할 것 같아요. … 선생님,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영지 선생님은 안간힘을 내는 은희에게 이런 편지를 써 내려갔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1초에 무려 90번까지 날갯짓을 하는 ‘벌새’는 ‘은희’를 표현하는 더할 나위 없는 표현이자 제목이다. 김보라 감독은 “우리가 지금 겪는 감정과 은희가 겪는 감정은 사실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외양이 다를 뿐 감정의 근원은 같은 것이다. 어린 시절 겪은 감정이 나이 들었다고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고 했다. ‘벌새’를 보노라면 자꾸 스크린 앞으로 몸이 향한다. 은희의 감정에, 감정과 감정 간의 띄어쓰기에 솔깃해진다. 어느새, 내 안에서 새록새록 돋아나는 감정들이 어루만져진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https://entertain.naver.com/series/read?cid=1080122&oid=312&aid=0000407567

*텐아시아에 실린 칼럼을 다듬어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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