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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Nov 27. 2020

서늘히 찍어낸 레디메이드 스릴러

영화 ‘런’ 스틸컷./ 사진제공=올스타엔터테인먼트

*이 글에는 ‘런’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년 전 ‘서치’(2017)라는 창을 통해 아니쉬 차간티에게 로그인했다. 오래전 PC통신 하이텔로 로딩하던 첫 순간처럼 경이로웠다. 아버지가 사라진 딸을 찾는다는 낯익은 내용이 컴퓨터 화면으로 채워진 스크린이라는 낯선 형식 안에서 유연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101분 동안 바짝 긴장한 자세로 객석에 풀칠이라도 한 양 진득하게 붙어 있었다.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신작 ‘런’은 부모와 자식 간의 이야기를 다룬 내피도, 스릴러라는 장르적인 외피도 ‘서치’를 닮아있기에 극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야릇한 기대감이 일었다.     


다이앤(사라 폴슨 분)은 미숙아로 태어난 인큐베이터 속 딸을 응시하며 의료진에게 간절히 묻는다. “우리 아기, 살 수 있을까요?”     


17년 후. 외딴곳에서 다이앤은 딸 클로이(키에라 앨런 분)와 단둘이 오손도손 살고 있다. 클로이는 부정맥, 혈색소증, 천식, 당뇨병, 하반신 마비를 앓고 있는 중증 장애인이다. 다이앤은 클로이에게 먹일 야채를 기르고, 홈스쿨링으로 클로이를 가르치고, 클로이의 재활치료도 몸소 챙긴다. 클로이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구토와 투약, 채혈, 주사로 지탱하는 삶을 씩씩하게 감내한다.     


클로이는 워싱턴대학에 지원해서 합격 통지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우편배달부가 가져오는 우편물만 목이 빠지게 기다린다. 어느 날, 클로이는 다이앤의 종이 쇼핑백에서 최애 초콜릿을 몰래 가져오다가 약병을 하나 발견한다. 자신의 약으로 짐작되는 약병에는 다이앤의 이름이 적힌 라벨이 붙어 있다. 클로이는 꺼림칙한 마음에 엄마 몰래 약에 대해 파헤친다. 결국 클로이는 자신이 먹는 약이 동물의 근육 이완제고 사람이 복용하면 다리가 마비된다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은 클로이를 향해 다이앤이 다급히 달려온다.     


아니쉬 차간티는 ‘런(Run)’에서 한정된 공간을 바탕으로 삼아 효율적으로 공포를 배양한다. 다이앤의 등에 새겨진 상처는 학대를 어림하게 하는데 그녀에게 가족은 혹은 사랑이라는 개념은 일그러져 있다. 다이앤은 훔친 딸을 애지중지 키우면서도 그 딸이 커서 떠나려 하자 몸에 독을 뚝뚝 심는다. 휠체어 리프트로만 1층으로 이동이 가능한 집에서 클로이는 2층 방에서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없이 위험과 빈번히 맞선다. 클로이의 온몸에 꽂히는 듯한 공포가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사라 폴슨은 영화 ‘노예 12년’(2013), ‘캐롤’(2015), ‘글래스’(2019)에도 출연했지만 미국 FX의 인기 드라마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리즈를 대표하는 배우로 처연하고 서느런 연기에 탁월하다. 키에라 앨런은 실제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을 캐스팅하고자 했던 아니쉬 차간티가 선택한 배우로 첫 장편 데뷔작이지만 연기가 야무지다. 광기 넘치는 엄마 다이앤과 총기 넘치는 딸 클로이로 분한 두 배우의 탁구처럼 주고받는 연기 호흡이 절품이다.     


‘런’은 아니쉬 차간티가 서늘히 찍어낸 레디메이드 스릴러다. 레디메이드(ready–made)란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예술품이 된 기성품을 뜻한다. 서사적으로는 눈에 익은 기성품의 모습일지라도 클로이 뿐 아니라 관객을 달아나지 못하게 꼭 붙들어 매는 예술품으로 안착했다. 헌신에서 배신으로 이어지는 ‘런’의 서사는 시종여일 심장이 졸깃하게 내달린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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