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판 바이올렛 에버가든
*이 글에는 ‘극장판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객님이 원하신다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자동 수기 인형 서비스, 바이올렛 에버가든입니다.”
못내 아쉽지만 끝이다. 바이올렛 특유의 또랑또랑한 인사말도, 타자기를 또드락또드락 두드리는 소리도. 수려한 미모와 무구한 감성, 서늘한 전투력, 적확한 표현력을 근간으로 하는 필력까지 겸비한 소녀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스크린에 써 내려간 문장의 아릿한 마침표다.
한평생 육군이었던 아버지를 둔 길베르트 부겐빌리아(나미카와 다이스케 분)는 부친과 대립하는 형 디트프리트를 대신해 일찍부터 군인의 삶을 택한다. 디트프리트는 길베르트에게 북동부 교전지에서 주웠다며 살인 병기로 키워진 한 소녀를 맡긴다. 길베르트는 소녀를 전쟁 도구로만 보는 형과 달리 가련한 아이로 본다. 그는 소녀에게 ‘바이올렛’(이시카와 유이 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한다. 바이올렛은 길베르트를 통해 글자를 익히고 살포시 감정에도 눈뜨게 된다. 전장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길베르트는 아직껏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바이올렛에게 말한다. “바이올렛, 달아나서 자유롭게 살아. 진심이야. 사랑해….”
라이덴에 위치한 CH 우편사에서 바이올렛은 의뢰인의 편지를 대필하는 자동수기인형으로 근무한다. 바이올렛은 전쟁에서 양팔을 잃은 까닭에 기계손(의수)으로 타자기를 두드리면서 능란하게 임무를 해낸다. 불치병에 걸린 어머니가 자신이 죽은 후 홀로 남겨질 딸에게 50년간 생일마다 보낼 편지부터 남매 사이의 편지, 공주의 연애편지, 국왕 대관식의 선서문, 신작 오페라의 가사, 유명 극작가의 극본 대필, 바다를 위한 찬가까지. 바이올렛은 형태는 다를지라도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사랑을 혹은 감정을 감촉한다. 아직도 임무나 훈련이라는 단어가 입에 배어 있지만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차츰차츰 성장한다.
몇 달 뒤까지 대필 예약이 꽉 찬 바이올렛에게 소년 유리스의 의뢰가 들어온다. 마치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부모에게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의 유리스는 1년째 입원 중이고 세 번의 수술을 거친 중환자다. 유리스는 자신이 떠난 후에 남겨질 가족들에게 힘이 될 편지를 남기고자 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자신은 분명 차가워질 거라는 유리스의 허한 고백에 바이올렛은 유리스의 편지가 가족에게는 따뜻하게 전해질 거라고 위로한다. 죽음과 등을 대고 있는 소년의 속마음은 바이올렛의 마음까지 뒤울린다. 바이올렛은 매달 길베르트의 어머니 묘소에 참배를 간다. 묘소에서 바이올렛과 마주친 디트프리트는 길베르르틀 이제 그만 잊으라고 한다. 바이올렛은 결연히 말한다. 살아있는 한 잊을 수 없노라고. 그러던 어느 날, 바이올렛에게 길베르트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극장판 바이올렛 에버가든’(감독 이시다테 타이치)은 제5회 교토애니메이션 대상 수상작인 아카츠키 카나의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한 ‘바이올렛 에버가든’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고양이의 보은’(2002), ‘목소리의 형태’(2016), ‘리즈와 파랑새’(2018), ‘너와 파도를 탈 수 있다면’(2019)의 작가 요시다 레이코가 각본을 맡았다. 일명 ‘쿄애니’로 불리는 교토 애니메이션의 작품답게 작화가 빼어나지만 공을 들인 면면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배경부터 인물까지 촘촘하게 세공되었다. 특히 클라이맥스의 바닷가 신은 감정의 물보라를 일으키며 관객의 심장까지 때린다.
바이올렛과 길베르트의 이야기가 메인 플롯이지만 바이올렛이 자동수기인형으로 거쳐온 시간들도 끌어안는다. 그래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TV 시리즈(2018)와 ‘바이올렛 에버가든 – 영원과 자동 수기 인형 -’(2019)도 되새김질하게끔 한다. 그리고 CH 우편사 사람들의 바이올렛을 향한 애정도 훈훈하게 펼쳐진다. 우편사 사장 하진스의 과보호(?)도, 카틀레야 선배가 바이올렛이 길베르트를 향한 마음에 짓눌려 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도, 집배원 베네틱트와 자동수기인형 아이리스와 에리카의 동료애도.
바이올렛에게 상흔은 잃어버린 양팔보다 차가운 심장이다. 그래서 길베르트가 전장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바이올렛에게 삶의 이정표가 된다. 자신에게 이름을 주고, 살아가는 방법을 일러 주고, 늘 곁에 두고, 그리고 처음으로 “사랑해”란 말을 들려준 남자. 바이올렛이 무엇을 보든 무엇을 하든 길베르트에게로 이어진다. 문득 생각나는 그와의 추억은 선명히 되살아난다. 바이올렛은 길베르트에게 특별한 감정을 표현하는 말 “사랑해”를 조금 알게 되었노라 전하고 싶다. 마지막에 했던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 그래서 바이올렛은 언젠가 그 마음이 닿기를 바라며 거듭거듭 길베르트에게 편지를 쓴다.
‘극장판 바이올렛 에버가든’에서는 남자 주인공으로서 길베르트의 매력도 십분 발휘된다. 바이올렛에게 선물한 에메랄드 브로치로 그의 존재감은 시리즈 내내 깃들어 있었지만. 전쟁에서 오른쪽 눈과 오른팔을 잃고 에카르테 섬에서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살아온 길베르트의 첫 등장에 탄성이 터진다. 바이올렛은 길베르트와 관련된 이야기에는 온 마음으로 온몸으로 반응한다. 오래전 그의 미소에 그의 따스한 손에 감응했던 그날들처럼. 그래서 바닷가에서 바이올렛이 길베르트에게 토해내듯 자신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전하는 순간순간이 눈물겹다. 쿠키 영상으로 바이올렛과 길베르트의 행복스런 청사진을 마주할 수 있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굳어진 감성까지 촉촉하게 빨아들이는 순정 리트머스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