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꾹꾹 부여잡던 순간과 조우하다

바이올렛 에버가든 -영원과 자동 수기 인형-

by 박미영
영화 ‘바이올렛 에버가든 - 영원과 자동 수기 인형 -’ 스틸컷./ 사진제공=라이크콘텐츠

*이 글에는 ‘바이올렛 에버가든 -영원과 자동 수기 인형-’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릴 적, 순정만화에는 탐나는 그림들로 수북했다. 만화 속을 유영하는 나의 얼굴에는 빙그레 미소가 감돌았다. 나는 만화방을 하던 부모님 덕분에 만화책을 집으로 가져올 수가 있었다. 모사화를 그릴 손재주가 없던 터라 만화 위에 기름종이(트레이싱지)를 덧대고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품곤 했다. 그 때문인지, 내 손을 거친 만화 속 주인공들은 유달리 친숙하게 느껴졌다. 만화의 칸 속 주인공은 나의 감성을 톡 건드렸고, 번번이 나는 주인공보다 더 많은 눈물을 툭 쏟아내곤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객님이 원하신다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자동 수기 인형 서비스, 바이올렛 에버가든입니다.”


라이덴에 위치한 CH 우편사에서 바이올렛 에버가든(이시카와 유이 분)은 의뢰인의 편지를 대필하는 자동수기인형으로 근무한다. 전쟁에서 양팔을 잃은 까닭에 기계손(의수)으로 타자기를 두드리면서. 바이올렛의 이번 행선지는 외딴곳에 위치한 여자 기숙학교다. 바이올렛은 본업인 대필가 대신에 석 달 동안 요크 가의 영애 이자벨라가 데뷔당트(성년이 되어 상류사회에 데뷔하는 여성)가 되도록 돕는 가정교사로 의뢰를 받았다.


이자벨라 요크의 본명은 에이미 바틀릿이다. 요크 가의 사생아로 태어난 에이미는 무일푼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간다. 그러다가 전쟁통에 버려진 아이 테일러를 만나고 동생으로 품는다. 에이미는 테일러를 위해서 진력하지만 혹독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불쑥 에이미를 찾아와서는 이름과 과거를 뒤로하고 따라나서면 테일러를 책임지겠노라 약조한다. 그렇게 에이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인생을 팔아넘긴다.


이자벨라 요크에게 여자 기숙학교는 감옥처럼 옥죄는 곳이다. 이자벨라는 높은 담으로 에워싼, 바깥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두터운 마음의 벽만 쌓는다. 바이올렛은 이자벨라의 가정교사로서 능란하게 임무를 해낸다. 이자벨라는 더없이 완벽하고 한없이 상냥하기까지 한 바이올렛의 상흔을 헤아리면서 마음의 벽을 허물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이올렛에게 동생 테일러에게 보낼 편지의 대필을 부탁한다.


어언 석 달의 시간이 흐른다. 바이올렛은 기숙학교를 나서면서 이자벨라를 “에이미!”라고 부른다. 테일러를 사랑하기에 버린, 더 이상 불릴 일이 없는 그 이름으로. 생애 처음으로 친구가 생긴 두 소녀는 서로를 진심으로 마주한다.


‘바이올렛 에버가든 –영원과 자동 수기 인형-’(감독 후지타 하루카)은 제5회 교토애니메이션 대상 수상작인 아카츠키 카나의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한다. TV 애니메이션 ‘바이올릿 에버가든(ヴァイオレット・エヴァーガーデン)’의 극장판인데, TV판과 극장판 모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일명 ‘쿄애니’로 불리는 교토 애니메이션의 작품이다. ‘목소리의 형태’(2016) ‘리즈와 파랑새’(2018) 등으로 증명되었듯 이번 작품도 작화가 빼어나다. 그리고 촉촉한 음악이 깃들면서 고풍스러운 매력이 배가되었다.


테일러는 에이미가 만들어 준 곰 인형과 에이미의 편지가 가장 소중하다. 허나 테일러에게 에이미와 함께한 시간들은 어렴풋하다. 편지가 있었기에 언니의 존재와 사랑을 잊지 않았던 테일러는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픈 꿈이 생긴다. 그래서 고아원을 박차고 나와서 집배원이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바이올렛을 찾아간다. 바이올렛은 숫자만 더듬더듬 읽는 테일러에게 글자를 가르친다. 오래전 길베르트 소좌가 자신을 가르쳤듯이.


바이올렛은 전쟁 중 군에 발견되어 살인 병기로 키워졌다. 길베르트를 만난 연후에 ‘바이올렛’이라는 이름이 생기고 글자를 익히고 감정에도 눈뜨게 된다. “바이올렛, 달아나서 자유롭게 살아. 진심이야. 사랑해….” 아직껏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바이올렛에게 길베르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삶의 지표가 된다. 바이올렛은 아이와 부모 사이의 편지부터 남매 사이의 편지, 연애편지를 대필하면서 형태는 다를지라도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사랑을 감촉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친구도 생긴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길베르트가 선물한 에메랄드 브로치를 지닌 채 타자기를 타닥탁탁 두드린다. 아직도 임무나 훈련이라는 단어가 입에 배어 있지만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차츰차츰 성장한다. 바이올렛이 교감을 하는 순간, 내 안에서 어린 시절의 그 감성들이 꿈틀거린다. 그예 기름종이를 덧대면서까지 연필로 꾹꾹 부여잡던 순간과 조우한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