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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Dec 14. 2020

간결체로는 써 내려갈 수 없는 결혼의 풍경

결혼 이야기

영화 ‘결혼 이야기’ 스틸컷./ 사진제공=넷플릭스

*이 글에는 ‘결혼 이야기’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2019)는 전작 ‘오징어와 고래’(2005) ‘프란시스 하’(2012) ‘위아영’(2014)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2017)에서 2시간을 넘기지 않았던 것과 달리 무려 137분이다. 타고난 이야기꾼답게 그의 개인적 경험들은 엄청난 배양력을 자랑한다. 특히 이번 작품은 무르녹은 서사가 돋보인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연극 연출가 찰리(애덤 드라이버 분)와 LA 출신의 배우 니콜(스칼렛 조핸슨 분) 부부는 별거에 이어 이혼을 목전에 두고 있다. 8살 아들 헨리(어지 로버트슨 분)의 양육권 문제로 이혼 소송도 거쳐야 한다. 부부와 가족처럼 지내는 극단 사람들은 기분이 묘하다. 마치 자신의 부모님이 헤어지는 기분이다. 찰리와 격의 없이 지내 온 장모 샌드라(줄리 하거티 분)도 심란하다. 샌드라는 이혼변호사를 구하느라 진땀나는 사위에게 변호사도 소개하고 “힘내, 우리 찰리”라며 각별한 응원마저 보탠다.       


찰리와 니콜의 인연은 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니콜은 배우로서는 잘나갔지만 활기가 없었던 스무 살, 뉴욕에서 본 초현실적인 연극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연출과 배우를 겸했던 찰리와 단숨에 사랑에 빠졌다. 극단이 호평을 받고 찰리도 주목을 받는 사이 정작 배우인 자신의 존재감은 옅어졌다. 그저 찰리의 취향을 따르는, 찰리의 인생에 맞추는, 즉 찰리에게 생기를 더해주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 니콜에게 두둑한 출연료가 약속된 파일럿 촬영이 들어온다. 니콜은 자신에게 생명줄처럼 내려온 기회를 찰리가 응원은커녕 조소하고 극단 예산으로 쓸 출연료에만 관심을 보이자 비감에 젖는다. 니콜은 끝끝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찰리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촬영이 있는 LA로 향한다.


니콜이 아이디어를 낸 찰리의 작품은 브로드웨이로 진출한다. 게다가 찰리는 천재들의 상으로 불리는 ‘맥아더상’까지 수상한다. 니콜은 그와 견주면 자신의 파일럿 드라마는 좀 삼류 같다. 찰리는 뉴욕에서부터 아들과 핼러윈 데이를 함께하려고 투명 인간과 프랑켄슈타인 의상을 준비했건만 고새 마음이 바뀐 헨리는 닌자복을 고집한다. 그리고 헨리는 LA도 여기서 생긴 친구들도 좋다며 찰리에게 좀 더 자주 오라고 징얼댄다.


오래전 니콜에게는 LA에서 살자는 약속이 찰리에게는 상의쯤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LA에서 다른 인생을 꿈꾸는 니콜과 파일럿 촬영이 끝나면 뉴욕 집에서 같이 생각해 봤으면 싶은 찰리의 생각은 점점 서로에게 겉돌기 시작한다.        


‘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는 스릴러, 법정물, 로맨틱 코미디, 스크루볼 코미디, 뮤지컬 등 다양한 맛이 우러나는 작품이다. 극 중에도 나오지만 형사변호사는 악당의 최선을 보고, 이혼변호사는 선한 사람의 최악을 본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혼변호사는 셋인데 앞의 말에 최적화된 제이(레이 리오타 분), 인간미가 넘치는 버트(앨런 알다 분), 최선과 최악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노라(로라 던 분)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미팅룸에서 혹은 법정에서 찰리와 니콜의 입을 대신한다. 변호사의 입을 통해 니콜은 가슴을 노출하는 삼류영화에 나왔지만 찰리 덕분에 대형 방송국의 TV 드라마 주연에 신뢰를 받게 된 배우로, 찰리는 보잘것없는 연극이지만 니콜 덕분에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모으고 명성을 쌓게 된 연출자로 정의된다. 변호사 앞에서 부부는 울음보가 터지기도 한다. 니콜은 자신의 감정을 살피는 질문에, 찰리는 마치 자신이 범죄자가 된 기분에….


니콜과 찰리가 별 의미 없이 툭 던진 말들이 얼얼한 송곳이 되어 상대를 향해 내리박힌다. 대화다운 대화를 시도하려는 두 사람의 노력도 감정적으로 치달을 따름이다. 상대에게 아킬레스건인 가족을 빗대서 비난하는 것도 모자라서 아낌없는 저주까지 퍼붓고 나서야 대화가 끝이 난다. 사실 10여 년에 걸친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나도 가족으로서는 완벽하게 끝은 아니다. 제법 고집도 세고, 어렵다고 느끼면 이내 포기하고, 모노폴리는 꽝이고, 양말을 쭈욱 끌어올린 ‘양말 바지’가 좋은 아들 헨리가 두 사람의 접점인 까닭이다.


니콜 역의 스칼렛 조핸슨에게 마냥 몰입하게 되는 작품이다. 언젠가부터 굵직굵직한 영화에서 통문장으로 등퇴장했던 그녀가 ‘결혼 이야기’에서는 주어로 목적어로 혹은 보어로 각각의 방점을 찍는다. 스칼렛 조핸슨은 뉴욕에서도 찰리의 아내로서도 충분히 살아왔고, 아직도 ‘여보’가 입에 붙어 있고, 살벌하지 않게 헤어지고, 이혼 후에도 친구로 지내고픈 니콜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니콜이 “잘 자, 찰리” 하고 돌아서면서 흐느끼고, 직전까지 양립하다가 점심 주문으로 대동단결한 변호사들 틈에서 당혹스런 찰리를 대신해 촘촘한 주문을 해 주고, 찰리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깎아 주고, 발걸음을 돌리려다가 찰리의 풀린 신발 끈을 묶어 주는 순간들은 조밀한 감정들로 차오른다. 특히 변호사 노라의 사무실에서 니콜이 자신의 지난 삶을 차근차근 헤아리는, 원 테이크로 진행된 신은 앞으로 스칼렛 조핸슨의 이름에 따라붙을 명장면이다.


찰리로 분한 애덤 드라이버의 연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애덤 드라이버는 뉴욕에서 니콜의 남편으로서 확신에 찬 삶을 누리다가 이혼 소송으로 인해 곤두박이치는 일상으로 변화한 찰리를 서슴없이 그려냈다. 찰리가 니콜의 집을 귀엽노라 칭찬하고, LA라면 질색이었건만 UCLA 전임직으로 당분간 LA에서 지낸다고 토로하고, 샌드라의 집에 걸린 가족사진 액자에서 자취를 감춘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들은 묵직한 감정들로 차오른다. 애덤 드라이버가 뮤지컬 ‘컴퍼니’의 ‘Being Alive’를 부르며 후우하고 한숨을 내뱉는 모습은 쓸쓸하지만 미려하기도 하다.


이 작품의 첫머리는 니콜과 찰리가 이혼 조정관의 지시로 작성한 상대의 장점 리스트다. 두 사람은 부모로서의 자질뿐 아니라 그 사람 고유의 매력까지 세세히 기술했다. 니콜이 ‘난 평생 그를 사랑할 거다. 이제 말이 안 되긴 하지만’이라고 쓴 구절과 찰리가 ‘니콜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다’라고 쓴 구절은 관객의 마음까지 뒤흔드는 문장들이다. 이혼에 이른 그들은 서로를 떠올리는 순간이 불쑥불쑥 찾아들 것이다. 니콜은 양말에 구멍이 나거나 슬픈 영화를 볼 때마다, 찰리는 병뚜껑을 따거나 까다로운 가족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그리고 모노폴리를 할 때마다….


‘결혼 이야기’는 결혼의 풍경을 담아낸 작품이다. 결혼은 서로의 삶에 깃들고, 서로의 삶을 물들이는 과정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 아득한 사람이 되는 이혼을 담더라도 간결체로는 써 내려갈 수 없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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