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미영 Dec 22. 2020

내겐 너무 이쁜 어른아이

매기스 플랜

영화 ‘매기스 플랜’ 스틸컷./ 사진제공=오드

*이 글에는 ‘매기스 플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래전 어느 영화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예술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가장 철들지 않은 인간들이 모이는 곳이 영화판이라고. 첫 영화를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작가였던 내가 전 영화인을 판단할 깜냥이 되었겠는가. 여하튼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호응했다. 나 스스로가 당최 철들지 않은 인간이었던 까닭에서다.
 
기실 영화에서 철들지 않은 어른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경우는 빈번하다. 그리고 나는 지남철에 끌리는 쇳덩이처럼 그들에게 철썩 들러붙는다. 그러한 연유로 어른아이가 무려 셋이나 등장하는 ‘매기스 플랜’(2015)에 솔깃하지 않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뉴욕의 한 대학에서 매기(그레타 거윅 분)는 졸업생의 디자인계 진출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절친 토니(빌 헤이더 분)의 제법 큰 아이에게서 아직도 아기 냄새가 남아있다며 큼큼거릴 만큼 아이를 좋아한다. 6개월을 넘기는 연애가 불가한 매기는 특별한 계획을 하나 세운다. 인공수정할 정자를 기증받아서 엄마가 되는 것이다. 수학을 전공했으나 현재는 피클 사업을 하는 대학 동창 가이(트래비스 핌멜 분)가 흔쾌히 기증을 약속한다.
 
매기에게 월급이 이중 지급된다. 그녀는 이 일을 계기로 대학 강사 존(에단 호크 분)과 인연을 쌓게 된다. 존은 혼합비평적 인류학 분야에서 저명한 학자지만 컬럼비아대의 종신교수인 아내 조젯(줄리언 무어 분)에 비하면 미미하다. 존은 자신과 조젯의 관계를 정의한다. 모든 관계에는 정원사와 장미가 있다고들 하는데 자신이 정원사고 조젯은 장미라고. 매기가 존이 장미일 수도 있다고 따독여도 존은 자신은 후줄근한 장미일 것이라며 소침하다. 존은 소설을 집필 중이라며 매기에게 첫 독자를 부탁한다.
 
존은 홀로 아기를 갖겠다는 매기의 용기를 치켜세운다. 그리고 매기라는 사람에 대해 좀 더 알고저 한다. 매기는 자신의 시작이 좀 특이했다고 운을 뗀다. 부모 모두 위스콘신 대학교수였고, 일찍 결혼했으나 이혼으로 끝났고, 수년 뒤 파티에서 만나 얼결에 자신이 생겼노라고. 매디슨에서 매기는 엄마와 단둘이 즐겁게 살았다. 엄마는 19세기 영시를 가르치는 교수였으나 세상 물정에는 캄캄했던지라 소소한 집안일마저 어린 매기의 몫이어서 12살부터는 청구서 정리까지 맡았다. 매기가 16살 때 엄마가 죽고, 필라델피아의 아빠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매기와 아빠는 최대한 밝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매기에게는 화목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외로운 나날들이었다.
 
매기의 엄마는 오래전 그날의 일은 매기가 태어날 운명이기에 벌어진 것이라고 했다. 존은 재미있는 생각이라면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인간의 신들이고,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의 운명을 결정해 주는 것 같다고 해득한다. 이윽고 매기의 디데이가 도래한다. 혼자서 인공수정을 시도하던 매기에게 존이 불쑥 찾아와서 급히 사랑을 고백한다.

3년 후. 이제 매기의 곁에는 남편이 된 존과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아이 릴리가 있다. 숫자를 너무 좋아하는 세 살배기 릴리는 엄마가 자신을 25,362만큼 사랑한다며 남다른 표현력을 자랑하는 소녀다. 매기는 내내 글만 쓰는 존에게 무엇이든 양보하고 맞춰 준다. 마치 존의 인턴이나 보모가 된 양. 속없는 존은 매기를 타고난 엄마로만 생각한다. 존은 전부인 조젯과 하루에 서너 번씩 통화하고 앓는 소리를 달래 준다. 매기는 무신경한 존에게 삐걱대는 바퀴에는 기름칠해 주고 선인장에는 물을 안 주는 거냐며 볼멘소리를 한다. 매기는 자신의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온 마음으로 느낀다.
 
‘매기스 플랜(Maggie's Plan)’은 레베카 밀러가 친구인 카렌 리날디의 미완성 소설을 시나리오로 각색하고 연출한 작품이다. 레베카 밀러는 극작가 아서 밀러의 딸이자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아내이기도 하다. 푸근푸근한 뉴욕을 배경으로 무구한 어른아이 매기와 존, 조젯, 가이가 빚어내는 ‘매기스 플랜’의 풍경은 탐스럽다.
 
매기의 첫 계획은 결혼과 남편을 생략하고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매기에게 계획에 있던 아이가 생겼지만 계획에 없던 남편도 생겼다. 매기는 두 번째 계획을 짠다. 단절된 관계의 언저리를 헤매는 가식적인 결혼 생활을 끝내고자 한다. 좋든 싫든 묵은 감정으로 엉겨 있는 전처에게로 남편을 돌려보내려고 한다. “조젯, 당신은 애정 결핍에 자기도취가 심하지만 존한테는 그게 필요해요. 남을 돌보지 않으면 자기 생각만 한다고요.” 처음에는 극렬한 거부감을 표하던 조젯도 매기의 계획에 동참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다. 가식이 없는 두 여자는 서로의 상처까지 쓰다듬는 관계로 성장한다.
 
매기를 사로잡은 존은 365일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던 부모를 보면서 성장한 민감한 남성이다. 존은 자기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듯한 인류학자 조젯과 결혼했다. 조젯과의 관계에서 자신은 정원사고 조젯은 장미였다. 그런데 원예에는 그닥 소질이 없었다. 존은 소설을 쓰는 자신을 장미로 봐주는 매기와 결혼했다. 그는 걸작을 써내지 않으면 매기가 자신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은 내용이 자꾸 산으로 가고, 소설가로서 자질은 눈곱만큼도 없기에 불안스럽다.
 
매기에게 사로잡힌 가이는 귀를 덮는 털모자와 덥수룩한 수염, 추운 날씨에도 7부 팬츠를 입는 수더분한 사나이다. 그에게 가이라는 이름은 맞춤옷 같다. 수학이 아름다워서 수학의 옷깃만으로도 충분한 그는 피클맨으로의 현재에 충실하다. 매기에게 시종여일 은근히 감정을 어필하지만 매기는 가이보다 피클에 눈길이 머문다. 영화의 끄트머리에 이르러서야 매기가 가이를 제대로 마주보는데 그 순간 관객의 심장도 함께 요동친다. 가이를 연기한 배우 트래비스 핌멜의 매력도 한몫한다.
 
비눗방울 속에 살고픈 매기는 천진한 소녀와도 같다. 그녀는 체크 코트에 조끼나 카디건을 즐겨 입고, 진한 색감의 타이츠를 신는다. 또한 피클을 와그작와그작 맛나게 먹고, 양팔을 힘차게 저으며 걷곤 한다. 천생 모범생에 오지라퍼인 그녀는 생각이 너무너무 많다. 매기가 “다신 누군가의 운명에 끼어들지 않을 거에요. 내 운명에도”라고 각오해도 속다짐에 그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매기는 자신처럼 밝고 누군가(?)처럼 똘똘한 딸 릴리와 올망졸망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지 싶다. 가족끼리도 여간해서 안 하는 입 냄새를 체크해 주고, 각자의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산책하고, 그녀의 모든 계획을 공유하는 절친 토니의 화딱지도 종종 돋우면서.
 
‘매기스 플랜’을 보노라면 근래에는 감독으로 더 존재감을 빛내는 그레타 거윅을 배우로서도 열망하게 된다. ‘프란시스 하’(2012)의 댄서 프란시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의 프리터 브룩, ‘우리의 20세기’(2016)의 포토그래퍼 애비를 되새김질하게 한다.
 
“네가 어른 되는 게 싫은가 봐. 자기도 철들어야 하니까.”
 
극 중에서 토니의 아내 펠리시아(마야 루돌프 분)가 매기에게 하는 대사다. 나도 토니와 한마음이다. 무엇보다도 그레타 거윅은 내겐 너무 이쁜 어른아이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간결체로는 써 내려갈 수 없는 결혼의 풍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