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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영 Dec 23. 2020

사랑을 되읽다

먼 훗날 우리

영화 ‘먼 훗날 우리’ 스틸컷./ 사진제공=넷플릭스

*이 글에는 먼 훗날 우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떤 배우들은 화선지의 먹물처럼 스크린 속으로 자르르 스며든다. 대사 없이 눈짓과 몸짓만으로도 화면 가득 그들이 분한 인물의 감정으로 차오른다. 주동우 역시 그러한 배우다. 그녀의 이름에 밑줄을 쫙 긋고 느낌표까지 꾹 찍게 하는 배우다.     


2007년 섣달그믐, 베이징에 사는 젠칭(정백연 분)은 춘절을 지내기 위해 친구들과 고향 야오장으로 향한다. 기차에서 젠칭은 티켓을 잃어버려서 곤혹스러운 샤오샤오(주동우 분)에게 호의를 베푼다. 공교롭게도 둘은 동향 사람이다. 엄마가 재혼해서 외국으로 떠난 까닭에 아무도 없는 고향 집에 온 샤오샤오는 젠칭의 아버지(티엔주앙주앙 분)가 하는 ‘린가네 식당’에서 왁자지껄한 춘절을 보내게 된다. 젠칭의 아버지와 지인들은 내년에도 오겠노라며 싹싹하게 구는 샤오샤오를 귀애한다.      


어느덧 베이징에는 좋은 시절을 기다리는 젠칭과 샤오샤오만 덩그러니 남는다. 젠칭의 친구에서 샤오샤오의 친구가 된 친구들이 하나둘 떠난다. 중관춘 전자상가에서 일터를 잃은 젠칭은 불법 소프트웨어 판매로 나선다. 베이징 남자와의 연애에 번번이 실패하는 샤오샤오는 젠칭의 골방에서 더부살이를 한다. 티격태격 입씨름을 하면서도 상대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달려가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눈다. 설레는 마음에 앞으로 나서는 젠칭과 달리 샤오샤오는 우정을 지키고 싶어서 뒤로 물러선다. 허나 젠칭이 불법 판매 건으로 감옥에 갔다가 출소한 날에 샤오샤오는 망설임 없이 사랑을 고백한다. 두 사람은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을 만큼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고향에서 춘절을 지내려고 젠칭과 샤오샤오는 차를 렌트해서 야오장으로 향한다. 젠칭은 자신의 허세에 대한 친구들의 뒷담화를 엿듣게 되고 샤오샤오와의 싸움으로까지 번진다. 갑작스레 집주인이 집을 비워 달라는 요구에 그들은 반지하 집으로 내몰린다. 무력하게 컴퓨터 게임에만 눈길을 박고 있는 젠칭을 뒤로하고 샤오샤오는 쓸쓸히 떠난다. 실의에 젖어있던 젠칭은 전력을 다해 자신을 몰아붙이며 컴퓨터 게임을 완성한다. 젠칭과 샤오샤오를 함의하는 캐릭터 이언과 켈리가 등장하는.      


2018년 춘절 전, 베이징 행 비행기에서 젠칭과 샤오샤오가 해후한다. 그들은 그윽한 미소로 서로를 응시한다. 오래전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폭설로 항공기 운항이 취소된다.      


유약영 감독의 ‘먼 훗날 우리(后來的我們)’는 소설 ‘춘절, 귀가’를 원작으로 한다. 2007년 섣달그믐부터 2018년 춘절 전까지 십여 년에 걸친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담아낸다. 두 사람이 해후한 하루 속에 함께였던 과거를 켜켜이 밀어 넣으면서 짙은 감정들이 우러난다. 과거는 컬러로 현재는 흑백으로 나오는데 젠칭이 만든 컴퓨터 게임 안에 그 답이 있다. 남자 캐릭터 이언이 여자 캐릭터 켈리를 끝끝내 못 찾으면 세상이 온통 무채색이 되는…. 오롯이 그들이 함께였던 시간들만 채색이 되는 것이다.      


샤오샤오 역의 주동우는 오색영롱한 매력을 여지없이 발휘한다. 장이모 감독의 ‘산사나무 아래’(2010)의 징치우, 증국상 감독의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2017)의 안생과 ‘소년시절의 너’(2019)의 첸니엔으로 보여준 그녀의 맑디맑은 웃음과 울음을 이번 작품에서도 마주할 수 있다. 젠칭 역의 정백연은 멜로의 촉촉한 감성을 잘 풀어낸다. 젠칭의 아버지를 연기한 티엔주앙주앙의 묵직한 연기도 긴 여운을 남긴다.      


폭설로 멈춘 기차에서 샤오샤오와 젠칭은 창문 너머로 순록을 보고 충동적으로 내린다. 젠칭은 자신이 두른 목도리를 풀어서 샤오샤오에게 한쪽 끝을 잡으라고 한다. 함께 폭설을 헤쳐 나갈 동지라면서. 그렇게 둘의 긴긴 인연이 시작된다. 샤오샤오는 편한 신발을 포기한 덕분에 눈길에서 젠칭의 따스한 팔을 의지할 수 있었고, 젠칭은 샤오샤오의 남자친구 덕분에 자신의 마음도 읽게 된다. 하늘에서 별을 따고 바다에서 진주를 캘 수 있을 만큼의 순정을.


두 남녀의 사랑만큼이나 베이징 분투기는 눈물겹다. 그들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향을 떠나 너른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다. 꿈을 이루고 기회를 잡을 곳으로 택한 베이징살이는 퍽퍽하다. 그들은 골방 연애일지라도 서로를 위해서 베이징을 견딘다.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건만 집이 목적이었던 젠칭과 보금자리를 원했던 샤오샤오는 결국 등을 돌리고야 만다.     


샤오샤오는 피난 가는 기분이 드는 춘절이 제일 싫었다. 그럼에도 감옥에 간 젠칭을 대신해서 젠칭의 고향 집에 홀로 갔고, 이별 후에도 춘절에 젠칭과 함께 고향 집에 갔다. 바로 젠칭의 아버지 때문이다. 샤오샤오에 대한 정이 각별했던. 미루어 짐작건대 샤오샤오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젠칭의 아버지가 남긴 편지는 샤오샤오뿐 아니라 관객의 가슴마저 먹먹하게 한다.      


‘올해도 네 몫을 남겨 놓으마. 인연이란 게 끝까지 잘되면 좋지만 서로를 실망시키지 않는 게 쉽지 않지. 너희 둘이 함께하지 못해도 넌 여전히 우리 가족이란다. 밥 잘 챙겨 먹고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렴.’     


샤오샤오는 젠칭의 곁에 꼭 붙어 있고 싶었지만 혹여 헤어진다면 죽을 때까지 보지 말자고 했다. 반면 젠칭은 샤오샤오가 잘 지내는지 보고 싶었고, 사랑하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자 했다. 다시 만난 젠칭과 샤오샤오는 자신들이 헤어진 이유를 더듬다가 가슴이 무너진다.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지만 이제는 서로를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기에 끓는 울음을 토해 낸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면서 서로를 토닥인다.      


‘먼 훗날 우리’는 생각만으로도 애틋한 그 시절의 사랑을 되읽는다. 에필로그까지 보고 나면 그 시절의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진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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