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가람
영화 ‘4등’(감독 정지우)의 천재 수영선수였던 광수는 애어른이었다. 차가운 물살을 가르는, 뜨거운 심장이 느껴지는 소년이었다. 광수 역의 정가람은 입에 착착 붙는 사투리와 팔딱팔딱 뛰는 눈빛으로 스크린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영화 ‘기묘한 가족’(감독 이민재)에서는 좀비이지만 유약하고 양배추와 케첩을 즐기는 채식주의자 쫑비 역을 맡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이 겹쳐지는 캐릭터다.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차가운 심장을 가진 좀비로 돌아온 정가람을 만났다.
완성된 영화는 어떻게 보았는지?
정말 재미있게 봤다. 시나리오를 받고 중간중간에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 생각했던 지점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도 잘 산 것 같고. 그런데 내가 나오는 장면은 잘 못 보겠다. 아직까지는 내 역할을 한번에 다 보기가 좀 부끄럽고 부담스럽다. (웃음) 개봉하면, 혼자서 편하게 한 번 더 보려고 한다.
시나리오를 받으면서 가장 끌렸던 점은?
일단 좀비라는 점. 흔치 않았다. 아버지부터 가족들 모두가 개성 있는 캐릭터였다. 한적한 시골에 좀비가 쓱 나타나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너무 신선하고 재미있게 다가왔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받고 미팅을 할 때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함은?
다 할 수 있다. 목숨 걸고 할 수 있다. 이런 표현까지 했다.
좀비물을 즐겨 보는 편이었나?
많이 봤다. 미드 ‘워킹 데드’ 같은 경우는 웬만한 사람들이 한 번쯤은 본 작품이기도 하고. 그 외에도 ‘새벽의 저주’, ‘나는 전설이다’(2007), ‘월드워 Z’(2012)도 봤다. 예전 룸메이트가 완전 마니아였다. 내가 좀비 역을 한다고 하니까 당시에 같이 살았던 그 친구가 “그럼 진짜 다 보여준다”면서 찾아서 보여줬다.
좀비이다 보니 늘 굳어있는 몸짓으로 연기를 해야 하므로 힘들었을 듯싶다. 그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다. 주유소 창문 청소 신은 진심 웃겼다.
(웃음) 진짜?
‘쫑비’는 유약한 좀비다. 영화 후반부의 좀비들처럼 상대가 겁을 먹어야 하는데 자신이 먼저 겁을 집어먹는다. 반전미가 있는 캐릭터라서 연기하는 맛은 더 있지 않았나?
창문을 닦고 있는 장면도 내가 어떻게 살릴지를 생각하면 안 되는 것 같고, 내가 열심히 하고 가족들이 건드려주면 재미있는 것 같았다. 현장에서 웃음 참기가 힘들었다. 식사 장면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다며 술을 한 잔 권하는 것은 애드리브였는데 거기서 웃음이 터졌다. 나는 양배추 먹는데 다들 고기를 먹어서 부럽기도 했고, 그래서 컷하면 고기를 집어먹고 그랬다. (웃음)
육식이라는 표현이 조금 과하긴 하지만 좀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그런데 쫑비는 양배추와 케첩에 빠진 채식주의자다. 촬영하면서 위는 튼튼해지고 이는 약해졌을 것 같은데 어떤가?
위는 튼튼해졌고 이는 처음에는 안 좋았다가 나중에는 굉장히 좋아졌다. 잘 씹다 보니까 계속 단련이 돼서. 양배추를 한 트럭 정도는 먹은 것 같다. 정말 수도 없이 뜯었다.
양배추라면 완전히 물렸을 것 같은데?
(촬영) 끝나고는 일 년 간 양배추도, 케첩도 안 먹었다. 요새 카베진(양배추 추출물로 만든 위장약)을 먹고 있다. (웃음)
좀비라서 특수 분장이 필요했다. 수고롭기는 해도 특별한 경험이었을 듯싶다.
처음에는 두 시간씩 걸렸다. 마지막에는 1시간 20분. 호흡이 잘 맞으니까 점점 짧아졌다. 분장하시는 분들이랑 진짜 많이 친해졌다. 분장을 안 하고 좀비 연기를 했을 때는 한 끗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분장을 딱 하고 하니까 괜찮았다. 리얼하고 싶었다. 핏줄 하나하나까지.
나이트 신에서 좀비들의 포텐이 터지는데 쫑비는 함께할 수 없는 처지여서 안타깝지 않았나?
안타까웠다. 해걸(이수경 분)을 지켜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영화 전체의 결은 다르지만 쫑비와 해걸의 관계만 놓고 볼 때는 니콜라스 홀트 주연의 ‘웜 바디스’(감독 조나단 레빈)가 떠올랐다. 좀비의 차가운 심장이 한 소녀 때문에 다시 뛰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주변 사람들이 로맨스적인 부분에서 떠오른다고들 했다. 수경이도 나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쫑비와 해걸의 관계가 그렇게 보여서 다행이었다. 로맨스라는 것이 합이 잘 맞아야 하는 거라서.
둘의 로맨스가 코미디에 잘 얹혔다. 두 배우가 호흡을 맞추면서 제일 힘들었던 점은?
한 명은 말을 안 하고 다른 한 명은 혼자 말한다. 그런 것들을 살리면서 어떻게 보여줄까 했는데 수경이가 너무 잘해서 좋게 봐주시는 것 같다. 사실 좀비라서 어려운 점은 있었다. 말도 안 하고 표정도 없으니까. 소리의 미묘한 차이로 그때그때 감정들을 표현했다. 이를테면 대사는 없지만 “으~어” 안에 하고 싶은 말들을 담아서 내보냈다.
쫑비와 해걸은 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로 정의되는 관계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리고 꽃처럼 이쁜 청춘들이기도 했다.
감사하다. 그렇게 보였다면 정말 다행이다.
이수경이 당신을 만물박사라고 하던데 그 지식들은 주로 어디서 얻는지?
다큐멘터리를 좋아해서 많이 본다. ‘그것이 알고 싶다’도. 재미있고 신기한 것들이 워낙 많다. 그렇게 보다 보니까 얄팍하게 지식이 생겼다.
극 중 대사로도 나오지만 우연이 아니라 운명처럼 엮인 가족이다. 현장 분위기는 어떠했나?
진짜 좋았다. 스탭과 배우 모두가. 코미디라는 현장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분위기였다. 선배님들이 너무 좋고 재미있었다. 너무 웃겨서 카메라가 흔들릴 때도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자면?
‘기묘한 가족’ 팀은 진짜 사이가 좋았다. 마지막에 가족끼리 다 같이 사진을 딱 찍는데 영화에서도 그런 사진이 담긴다는 것이 행복했다. 영화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찡했다.
쫑비는 ‘회춘 바이러스’ 덕분에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다. 지인들과 있을 때도 활력을 주는 존재인가?
활력을 주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그런 존재? 스스로는 에너지가 넘치지만. (웃음)
가람은 한글 이름 같은데 특별한 의미가 있나?
맞다. 강이라는 뜻. 누나는 새미다. 사촌들도 아사, 새하, 다솔 등 다 한글 이름이다. 최근에 부모님께 (의미를) 물어봤다. 강의 느낌이 잔잔하다고 하시면서 강처럼 주변 사람을 품고 더불어 잘 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셨다.
배우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있다면?
어릴 때부터 집에서 부모님과 영화를 많이 봤다. 일주일에 서너 편. 중고등학교 때부터 한 번 해볼까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경남) 밀양에는 연기학원도 없고 뭔가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스무 살이 되고 한 번 경험하게 됐다. 심장이 떨리고 머리가 하얘지면서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본 영화들 중에서 지금까지 아끼는 영화가 있다면?
‘다크 나이트’(2008)는 너무 재미있게 봤다. 눈을 못 떼게 만드는…. ‘굿 윌 헌팅’(1997)도 좋아한다. 난 실화를 좋아한다. 실화를 근거로 한 영화를 보면 막 찾아보고 그런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좋아하는 이유가 느껴진다.
그것도 실화니까. (웃음)
‘4등’(2015)의 어린 광수는 어른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대찬 소년이었다. 반면 ‘독전’(2018)의 강력반 막내 동우는 강한 캐릭터들이 운집한 가운데 어수룩하고 수수한 청년이었다. 폭탄을 발견하고 “형…”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는 너무 짠했다.
이해영 감독님의 인터뷰를 읽었다. 나를 뽑은 이유가 오디션 때 어색하게 못했는데 그 모습이 캐릭터랑 너무 잘 맞았다고. (웃음) 브리핑을 하는 긴 대사였는데 표준어로 하다 보니까 어려웠다. 그 어색한 모습에 막내 형사 같은 모습이 있었다고.
‘4등’에서 각각 소년과 어른으로 광수를 연기했던 박해준과 ‘독전’에서 스쳐 지나가는 장면에서는 아스라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한 작품에서 두 사람이 마주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 경상도 출신인 두 사람에게는 익숙한 사투리도 섞어가면서.
사실 박해준 선배님하고는 ‘4등’, ‘독전’ 그리고 ‘악질경찰’(2018)이란 작품까지 계속 만나 뵙고 있지만 같이 하는 장면은 없다. 만약 한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차기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감독 김용훈)에서 맡은 역할은?
한국으로 넘어와서 허탕하게 사는 20대 초반의 조선족 진태 역이다. 그래서 연변 사투리를 두세 달 배웠다. 현장 분위기도 좋았고 진짜 재미있게 찍었다. 나는 복을 받았다. 현장에서 선배님들 사이에서 많은 것을 배우니까. 연기로도 배우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나 행동까지도. 여러 작품을 하면서 워낙 좋은 선배님들을 만나서 보고 느끼는 점이 참 많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탐이 나는 장르가 있다면?
액션 쪽을 한번 해보고 싶다. 몸으로 뛰어다니고 부딪치고. 보는 사람에게까지 박진감이 전해지는 액션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액션을 잘하는 선배님들을 보면 너무 멋있고 신기하다.
[박미영 작가 miyoung1223@naver.com
영화 시나리오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텐아시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다.]
https://entertain.v.daum.net/v/20190212171638363
*텐아시아에 실린 인터뷰를 다듬어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