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이 늦은 사람 - 4
나는 서른 두 살에 결혼을 하고 서른 세 살에 아이를 낳았다. 딱히 빠른 결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늦은 나이도 아니었다. 몇 살 위 남편을 일하며 만나 짧은 연애 끝에 금방 결혼했다. 같이 하자고 계획했던 일도 많았건만, 아이는 우리 계획의 빈틈을 정확하게 파고들었고 자신의 자리는 스스로 만들겠다는 듯 당당하게 태어났다. 남편과 나는 두고두고 말하곤 했다. 아이가 그 때 생겨서 낳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는 영원히 아이가 없었을거야.
오래 함께했던 음악과 무대와 결별을 하고, 두 발 땅에 딛고 뛰어야 하는 현장에서 일할 때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가 현실적인 미래를 그려볼 수 있게 해주었다. 뒤늦게 음악이 아닌 다른 일을 하겠다고 뛰어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전력질주 하겠다고 해도 기꺼이 응원할 것 같았다. 친구들이 '어떻게 결혼을 결심했냐'고 물었을 때 연애의 설렘을 제외하고 보면 '결혼해도 딱히 삶이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 가장 컸다.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내 기대를 저버렸다. 아니 기대를 뛰어넘는다는 말이 더 맞을까? 훌훌 다 털고 떠났던 유학길, 겨우 졸업을 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을 때에도, 내 최고의 친구 우리 엄마가 순식간에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부푼 꿈을 안고 들어갔던 첫 직장에서 울며 쫓겨나던 때에도, 모든 것이 예상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나는 그 때까지는 희망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 더 치밀하면 조금 더 내가 준비하면 어렵더라도 꿈꾸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그 기대는 결혼을 기점으로 박살이 났다. 남편과 내가 함께 하려고 했던 일은 중간에 누가 일부러 발로 걷어찬 것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그 틈새에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동시에 내 커리어를 완전히 주저앉혔다. 하늘이 무너졌을 때 솟아날 구멍인 줄 알고 잡았던 국고보조금 사업은 윗선의 횡령비리로 경찰청, 검찰청에 재판까지 가는 경험을 선사했고, 어렵게 현업에 복귀한 곳은 미혼의 동료들이 가득한 현장이었다. 두달 내내 새 이모님과 지내며 고열에 들끓는 아이를 뒤로 하고 나는 도저히 다음 발걸음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는 오랫동안 나를, 지난 시간을, 내 가까운 사람들을, 아이를, 낱낱이 해부하며 깊은 골짜기로 가라앉았다. 매일 매일 생각했다. 열심히 했는데, 노력했는데, 게으름 피운 적은 단 하루도 없었는데, 모든 걸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 애를 썼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을까?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나는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하루하루 무사히 보낸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긴 우울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건, 엄마에게서 어릴 때부터 들었던 '몸이 아프면 내과를 가고, 마음이 아프면 상담을 가는거야' 하는 말이 항상 머릿속에 따라다녔다는 것이다. 덕분에 가까운 친구들이 '너 상태 좀 이상한 것 같다, 울어야 될만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째 그리 아무렇지도 않냐?'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가까운 상담센터 몇 군데를 알아보고 검사 예약을 했다. 종종 '센터를 어떻게 선택했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검사 먼저 진행하는 곳 그리고 내게 신뢰를 주는 스타일의 대화를 하시는 선생님을 찾아서 만났다. 그 기준은 아마 사람마다 다르겠지.
정신없이 달리다가 교통사고처럼 어딘가를 들이받고 멈춘 채 간신히 깨어나 보니 나는 달리기의 트랙 밖에 널부러져 있었다. 뒤늦게 길을 바꾸었으니 꾀를 피워서는 절대 안된다는 생각과, 억눌려 있던 자기 의지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제대로 익히지 못한 탓에 강박과 불안이 뒤엉켜 일으킨 사고였다. 덕분에 얻은 긍정적인 효과는 이 사실 자체를 깨달은 것, 하지만 반작용으로 나는 '내가 정말 늦은 것이다'는 상태에 미끄러져버렸다. 모든 것을 리셋해야 한다는 막막함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내가 트랙 밖으로 튕겨져나온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정말 어려웠다.
당시 내가 주로 부러워했던 세 가지 부류의 여성들이 있다. (심하게 왜곡이 있었음을 미리 밝힌다) 젊거나 재력이 넘치는 조부모의 물심양면 도움을 받아 별다른 물리적 힘듦 없이 맞벌이 육아와 커리어를 영위하고 있는 분들, 최신 트렌드에 맞는 배우자를 만나 맞벌이의 고통과 책임을 거의 동일하게 짊어지고 한팀으로 고군분투 하고 있는 분들, 아니면 신의 직장에서 조직과 정책이 제공하는 모든 권리를 알뜰하게 누리며 직접 금지옥엽 아이를 키우는 분들. '그 외 나머지'의 범주에 내가 있었고, 허덕이는 나는 영원히 마라톤의 선두그룹에는 진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엇을 원했던 것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남들에게는 앞날 창창한 연주자의 길로 보였다지만 나는 매일 나보다 어리고 뛰어나고 끼가 넘치는 다른 음악가들을 보며 절망을 느껴 무대를 포기했다. 무대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던 공연기획자의 길은 내 의지와 상관없는 것들이 끼어들 때 얼마나 나 따위는 접착력이 다 한 포스트잇처럼 날아가버릴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주변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나처럼 '중간에 주저앉은' 언니동생친구들이 많았다. 그저 모여서 매일 신세한탄을 하고 누군가를 원망했다. 그나마 모일 수 있어 울고 웃고 아이들과 씨름하고 남편들과 씨름하며 하루 하루를 간신히 버텼다.
어느 날 문득, 오랜 친구가 큰 아이 돌도 되지 않아 둘째를 가졌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친구가 누구보다 일찍 결혼을 하고 출산 육아로 집 안에 갇혀있을 때 찾아가 오래간만에 얼굴을 봤던 날이었다. 유학에서 갓 돌아와 발에 날개를 달고 있던 나에게 그가 말했었다. '두고 봐, 나는 다 키워놓고 너네들 애기 낳으러 들어갈 때 현업으로 복귀할 거야.' 그로부터 몇 년이나 지난 후였지만 그 때 그 친구의 심정이 어땠을까 수없이 되새겼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 졸업하도록 둘째 이야기가 나올 때면 여전히 들여다보이는 내 절망의 바닥에 진저리를 치며 반대했었다. 내가 낳지도 않은 둘째는 물론이고 남의 집 둘째 고민에도 펄펄 뛰었었다.
늦었다, 진로 바꿨을 때도 늦었는데 이제 정말 늦었다. 뒤로 돌릴 수도 없이 늦어버렸고, 나는 그냥 이렇게 되어버리는가보다, 내버려두자, 모르겠다, 매일 그랬다. 그렇게 방향없이 분노하고 무기력의 굴레 안에서 뱅뱅 맴돌던 때에도 아이러니하지만 아이가 있어 살아졌던 것 같다. 이 상태는 아닌 것 같아서, 지금보다 나은 무엇이 분명히 있을 것 같아서 상담도 멈추지는 않았다. 누구도 나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누구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시절. 그 '누구'가 '나'여야 한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깨닫기 위해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