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에 듣는 음악
언젠가부터 아침 출근길에 듣는 플리와 퇴근길에 듣는 음악이 나뉘어 있다. 일부러 나눈 것은 아니었는데, 특정 재생목록은 유독 회사 가는 길에, 다른 재생목록은 집으로 돌아갈 때 자주 듣게 된다는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음악(특히 팝송이나 가요)을 들을 때 무조건 가사부터 듣는 습관이 있다. 속사포 랩이나 제2외국어가 아닌 다음에는 웬만해서는 글자부터 귀에 들어오고, 가사의 배경이 된 맥락을 상상하고, 상상한 장면에 선율이 스며들면서 그 음악과 사랑에 빠지는 편이다.
일단 좋아하게 되면 음식이나 예술이나 몹시 편식한다. 꽂힌 음식은 일주일에 세 번을 먹게 되어도 기분이 좋고 한결같이 맛있다. 꽂힌 음악, 꽂힌 그림은 밤새도록 듣고 하루종일 보고 있어도 행복하고 짜릿하다. 꽂힌 공연은 매주 보러가도 늘 아쉽다.
내 출근길 플레이리스트 음악들은 어느 정도 그런 편식의 기간을 거쳐 안정기에 접어든 음악들이다. 대신 (마치 과거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풍경이나 향기처럼) 전주만 들어도 밀려드는 어떤 감정이 있고, 어찌보면 그 마음들을 다시 불러 일으키기 위해 자주 듣는 것일수도 있겠다.
(이하 의식의 흐름에 따른 부연 설명들)
이 고전적이고 유명한 노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애리얼이 스스로를 "Bright young women, sick of swimming, ready to stand" 라고 지칭하는 것.
오리지널 알라딘의 서사 자체에는 약간 불만족인 것이 없잖아 있지만, a whole new world 는 정말이지 이 가사 때문에 듣는다. "I've come so far, I can't go back to where I used to be."
영화관에서 아무 생각 없이 크루엘라를 보던 날, 오프닝 몇 장면에서 이미 넋을 잃고 있던 중 에스텔라가 새 직장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오직 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2007년 초봄의 기억,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고 새롭고 막막하던 그 때, 우연히 돌리던 TV 프로그램에서 원곡도 아닌 리메이크로 이 노래를 들으며 얼마나 많은 상상과 고민을 했었나.
"Birds flying high, You know how I feel..." 하는 도입부만 들어도 나는 갑자기 발밑부터 올라오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2007년 봄 그 때보다는 모든 것이 더 나으니까, 아니면 그 이후 통과한 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더 이상 겁날 것이 없으니까.
누군가는 멀쩡한 아동 애니메이션에 일부러 페미니즘 한 국자 확 부은 영화라고 했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있고 잘못은 수정해야 하고 얄팍한 상술일지언정 이전보다 나은 선택을 하는 것이 얼마나 상징적이고 힘이 있는지 많이 생각하게 했던 '영화 알라딘.'
"Don't you underestimate me"는 사실 나 스스로에게도 수없이 주문처럼 말하는 메시지이다. 학습된 굴레를 깨고 나오는 것은 정말 어렵지만 일단 아주 작은 각성이라도 하게 되면 균열이 생길 수 있고 can't go back to where I used to be. 그래서 다양한 기회와 낯선 경험은 중요하다.
어떤 계기가 필요하던 시기에 갑자기 이 노래를 만났다. 사실 얼음왕국 1도 2도 한 번도 집중해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엄청 유명했다는) 이 노래가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는지 전혀 모른 채 "Show yourself, I'm dying to meet you" 를 듣는 순간 그저 나 스스로에게 계속 같은 말을 해주고 싶어 수없이 반복해 들었다.
"You are the one I've been looking for all of my life 일생동안 찾아 헤맨 단 하나가 바로 너야 Show yourself, I'm ready to learn 너를 보여줘,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어 Here I am, I've come so far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You are the answer I've waited for All of my life 일생을 기다려온 해답이 바로 너야 Show yourself, let me see who you are 너를 보여줘, 네가 누군지 볼 수 있게 해줘"
아이들에게 많은 상상의 날개를 달아주었을 이 노래가 내게는 마지막 필요한 한 웅큼의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리고 고작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에 나온 음악 덕분에 나는 다음 번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러브스토리 없이 모험으로 가득한 이야기라 너무너무 좋아하는 모아나. 그리고 그의 각성 장면 중 가장 좋아하는 질문이 이 노래에서 나온다. "Moana, you've come so far. Moana, listen, Do you know who you are?" "Who am I?"
같은 크루엘라 영화의 음악이지만 이 노래에서 내게 의미있는 가사는 "I tried to be sweet, I tried to be kind, But I feel much better now that I'm out of my mind" 이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온 내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 같달까. devil 어쩌구 하는 나머지는 그냥 멋진 크루엘라 분위기가 철철 흘러나와 좋은 거고.
출근길 플레이리스트에는 몇 노래가 더 포함되어 있긴 한데 어쨌든 온통 디즈니다. (원래 재생목록 이름이 my_disney 였음) 나중에 추가된 팝송들은 주로 더 높은 존재에게 의지하고 '최선을 다하되 모든 일은 신의 뜻대로' 흐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 대충 이렇게 7곡 정도 듣다 보면 회사에 도착한다. 심호흡 한번 하고 일 시작하기 딱 좋다.
(퇴근길 플레이리스트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