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씨 Apr 11. 2022

왕년에 내가 말이야

지금이 더 좋은 사람의 왕년 라떼 한 잔

오래간만에 어릴 때 한 동네 살았던 지인을 만났다. 가벼운 점심을 먹고 공연 시간을 기다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문득 그가 말했다. "언니가 공연을 보고 들을 때는 보통 사람들보다 이해하는 깊이가 다를 거 아냐, 나는 그게 정말 좋을 것 같아."


철학과를 다니다 중학교 음악 선생님이  그는 음악을 사랑하면서도 악기 하나 깊이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이론은 빠삭해도 제대로  경지에 도달해볼 기회가 없었다며 투덜대길래, 요즘 성인 취미반이 얼마나 흥행인지 말해주고 싶어 내가 한동안 기타를 배운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고등학교 때부터의 로망을 실현하려고 기타리스트 친구의 후배를 선생님으로 소개받았다. 그로부터 4년, 일정 맞추기가 어려워 선생님을 네 번이나 바꾸면서도 근근히 배웠다. (물론 요즘은 또 소강상태다) 아이를 재워놓고 조용 조용 연습하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첫 선생님 말고 다른 선생님들은 내가 음악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레슨 시간에 가끔 칭찬을 해주셨다. 빨리 배우시네요, 설명을 바로 이해하시네요, 자세 좋으시네요. 그럴 때면 멋적게 '옛날에 다른 악기를 조금 배운 적이 있어서 도움이 되나봐요' 했었다.


여기까지 듣던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조금 배우긴 뭘 조금 배워, 내가 바로 음악 전문가라고 왜 말을 못해! 내 인생이 음악이었고 음악이 내 인생이었다고 왜 말을 못해, 내 삶이 온통 거기 들어있다고 왜 말을 안해~" 그 바람에 우린 기타 얘기를 멈추고 깔깔 웃었다.


마침 공연 시간을 기다리던 작품의 음악감독이자 학생 때 함께 수업을 들었던 후배가 등장했다. 이 시국에 공연장을 찾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다 말고 그는 선배처럼 음악하는 사람이 보러 올 때는 훨씬 쫄린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뮤지컬 잘 모르지, 아주 순수한 팬이야, 라고 손사래를 치는데 후배가 그런다. 눈 높은 전문가께서 내 작품을 인정했다고 생각하면 훨씬 좋다고. "그래, 내가 정말 눈도 높고 귀도 높은데 이렇게 팬이 된 걸 보면 정말 네 작품이 좋은 거야" 하며 또 같이 웃었다.


문득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매일을 새 마음으로 살려고 애쓴지 벌써 몇 해가 지났는데도, 악기를 들었던 때가 정말 까마득한데도, 여전히 나를 전문가라 부르는 다른 세상이 그대로 존재하는 게 새삼스러웠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극히 높은 전문성을 인정받던 분야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쪽으로 커리어를 전환해왔다.




연주자로, 20년을 오로지 무대만 바라보며 매일의 연습실을 견디던 삶에서 공연기획 현장으로 한 발짝 이동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아티스트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업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정부 교육사업으로 방향을 한번 더 틀면서 생전 처음 겪는 피드백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일 잘하는 건 알겠는데 너는 행정 전문가가 아니야, 다 해본 건 알지만 네가 마케터는 아니야.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왜 예술의 울타리 안에 눌러앉았나 후회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예술경영이 아닌 그냥 경영도 있고, 예술법이 아닌 비영리법도 있고, 예술교육이 아닌 교육학도 있는데 왜 나는 기왕 그만두는 김에 훨씬 멀리 가지 못했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 시야에 갇혀 고작 거기까지밖에 못 갔나. 인생에 단 하나 바꾸고 싶은 시점을 그 때로 손꼽게까지 되었다.


사업단 일이 마무리될 즈음의 나는 다시는 (순수) 예술 근처로도 가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넘어오라는 손짓에 기꺼이 따라갔다. 공통점이 많을 줄 알았던 그 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엔터 분야의 신사업 개발에서 내 전문성은 더 줄어들었다. 공연 현장의 경력으로부터 가져갈 것은 운영 한 가지 뿐이었고 용어부터 기술까지 새로 배울 것이 허다했다.


처음부터 엔터 시장에서 성장한 구성원들과 금융 컨설팅 업계에서 건너온 본부장급 리더들 사이에서 나는 하나라도 놓칠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루를 보냈다. 결국 아이가 아프고 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서 아쉽게 프로젝트를 놓고 나와야 했지만, 당시 활발하게 논의되던 IP 비즈니스나 가상현실 프로덕션이 얼마나 앞선 기술이었는지는 몇 년이 더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또 2년, 커리어의 마침표인지 쉼표인지 막막하던 시기를 나는 작은 유통회사 안살림을 꾸리며 보냈다. 영업직원들을 관리하고 경리 회계를 챙기며 자영업자의 어려움을 맛본 것이 이 때였다. 사장님들의 세상, 술 한잔과 뒷골목 담배 꽁초 틈으로 거래가 오가는 전통적인 영업 세계에서 나는 더더욱 초보였다. 내가 주장하는 절차나 원칙, 도리 같은 것들은 순진하게만 취급받았다.


아이가 자라면서 이번에는 아이를 연결고리로 만남이 찾아왔다. 공교롭게도 어디서 모셔가도 놀랍지 않을 인문예술 전문가 분들이었다. 사람이 모이자 나는 자연스럽게 몇 개의 프로젝트를 만들어냈다. 두드리면 문이 열리고 엮으면 일이 되었다. 나쁘지 않았다. 답답하고 구태의연하지만 익숙하고 예상 가능했다. 역시 사람은 하던 일을 해야 하나보다 싶었다. 아주 우연히 SNS 광고를 눌러보기 전까지는.


그 때 누른 두 개의 광고가 이후 내 커리어의 핸들을 급격하게 꺾었다. 하나는 성수동 소셜벤처의 둥지 루트임팩트에서 열리는 작은 이벤트였다. 지금도 헤이그라운드 6층의 계단식 라운지에서 스타트업 창업가 네 분의 이야기를 듣고 팀 운영에 대한 마지막 질문을 드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른 하나는 카오스 재단이 주최하는 과학 강연이었는데, 강연을 듣고 귀가하는 길에 '이런 이야기 들으며 살아야해' 라고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그 때 쯤 나는 어렴풋하게 알았던 것 같다. 새로운 세계가 나를 끌어당기는 매력을. 탐구할 것이 무한하고 모르는 것이 가득한 세상이 언제나 내게는 더 옳은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계속 낯선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멘탈과 유연함과 회복 탄력성을 갖춰야 하는지, 얼마나 배움에 열려 있어야 하고 얼마나 겸손해야 하는지는 잘 몰랐다. 좌충우돌 겪어내며 아프다 생각은 했어도 정확히 무엇을 위해 내가 깎이는지는 잘 몰랐었다.




스타트업에 '입문'한지 햇수로 5년차. 나는 더 이상 내 전체 경력의 연차를 세어보지 않는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내 이력서 어딘가 어필 포인트 한줄로 기록해두긴 한다. 하지만 새로운 조직 새로운 시장에 들어가는 것은 언어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국가의 이민자로 새출발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다행히 동료들은 내 '총 연차'나 '학번' 따위에 별 관심이 없다. 어쩌다 옛날 일하던 이야기가 나와도 마치 전래동화 듣는 어린이들처럼 잠시 신기해 하다가 곧 우리가 헤쳐나갈 미래 쪽으로 관심을 옮긴다. 덕분에 나도 오랜 습관들을 털어버리고 굳어진 편견을 녹여내며 스스럼 없이 배움을 이어갈 수 있다.


2022년 새해가 될 때 존경하는 동료의 편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흔한 권위의식 한번 내보이지 않는 내 모습이 놀랍다고. 나는 반대로 동료들이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전문성을 강요하지 않아 고맙다. 밥 몇 그릇 더 먹은만큼 인생 사는 법은 조금 노련할지 몰라도 새로운 것을 구현하고 전진하는 힘은 내가 더디고 모자랄 수 밖에. 누구의 말을 빌리자면 '찬란한 그들에게 걸리적거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따라가고 있다.


나에게 애정이나 관심을 가진 분들로부터 여전히 받고 있는 질문이 있다. "도대체, 왜?" 왜 악기를 그만뒀어? 왜 공연 일을 하지 않아? 왜 예술교육을 떠났어? 왜 재단이나 기업이 아닌 스타트업으로 갔어? 왜 교육이나 예술이 아닌 테크 산업이야? 그리고 왜 익숙한 플랫폼도 아니고 잘 모르는 B2B로 갔어?


그 뒤에는 이런 질문도 숨어 있다. "그 정도 했으면 이제는 잘 하는 일, 오래 해온 일로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야하는 것 아니야?"


글쎄 왜일까. 왜 나는 떠난지 오래 되었어도 '전문가' 소리를 듣는 길을 두고, 굳이 분기마다 다시 태어나는 듯 살아야 하는 이 곳에서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일들을 선택하며 살고 있을까.




지난 금요일 저녁 퇴근 직전에 어쩌다 보니 대화 끝에 동료가 내게 물었다. "그럼 코라는 지금, 음, 행복하세요?" 내가 잠시 생각한 시간이 2초나 되었을까. "네, 저는 지금이 제일 좋아요" 라고 금방 답을 하자 동료는 깜짝 놀랐다. 근래 자신이 이야기 나눈 사람 중 이 질문에 이렇게 빨리 답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고 했다.


물론 내가 확신에 차서 '지금 상태에 만족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과 뒤척임과 괴로움이 있었다. 앞으로도 매 순간 괴로워하며 선택을 하고 후회와 반성도 할 것이다. 그래도 오히려 내일이 선명한 이유는 아마 스스로 원해서 내린 결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누가 나에게 '도대체 왜' 라고 물어도 언제든지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렇게 살고 싶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고.


나도 사람이니까 가끔 전문가 소리를 듣는 것은 좋다. 솔직히 지금 일하는 분야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될 수도 없다) 그저 누구라도 고개 끄덕여줄 커리어 한 줄 정도 만들어둔 것이 다행이다. 어리고 휘청이던 내가 한 챕터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끝없이 지지해준 부모님, 제가 그걸 갚을 수는 없고 저도 제 아이에게 그런 부모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라떼 글은 갑분 부모님께 감사 인사로 마무리하는 게 적정하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빈 자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