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일에 대하여
아이 나이 만으로 꽉 채운 열한 살(2주 전에 생일 지남), 드디어 아이에게 Adhd를 설명해주었다. 아이는 만 여섯 살 봄에 시작된 틱 때문에 병원 검사를 하면서 Adhd 및 강박과 불안으로 인한 틱 진단을 받았다. 남편과 나는 약 복용에 대해 비교적 빠르게 합의하였고 아이는 그 해 가을부터 약을 먹기 시작해 벌써 햇수로 6년차가 된다.
틱은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현상이라 아이에게 일찌감치 알려주었다. 몸에 오는 알러지와 비슷한 것인데 나타날 때도 있고 숨을 때도 있다, 틱을 가진 사람도 있고 안 가진 사람도 있으며 일종의 체질 같은 것이고, 활동하는 데 좀 불편할 수 있으니 알러지 약처럼 틱 약이 너를 좀 더 편하게 도와줄 거라고 설명했다. 비염으로 병원을 자주 들락거리고 피검사도 몇 번 해본 아이는 금방 이를 알아들었다. 이후에도 여러가지 증상들이 온 몸을 돌아다닐 때 어떻게 느껴지는지 물어보면 이런 저런 대답을 곧잘 했다. 덕분에 나도 틱이라는 건 보는 사람이 더 힘들고 불편할 뿐 당사자는 오히려 괜찮다는 사실을 (이론이 아닌) 현실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가 커가는 동안 Adhd를 체감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주로 사소하고 반복되는 일에서 아이의 실수가 잦았고 나도 모르게 "너 알면서도 왜 그러는 거야" 다그치면 아이는 "나 진짜 하려고 했는데 잘 안돼, 왜 그런지 모르겠어" 하며 슬퍼했다. 내 기억에 아이가 이 발언을 처음 했던 건 어린이집을 다니던 때였다. 아주 아기 때부터 아이는 남들에게 사랑 받고 싶어하고 항상 좋은 결과를 내는 우등생이고 싶어했지만 마음처럼 그게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난히 더 규칙에 대한 강박과 어른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자신은 그토록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는데 함부로 룰을 어기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과격한 감정 표출도 서슴치 않았다.
이른 아침 약을 먹은 후 낮 시간 동안 다소 착 가라앉은 모습이 때때로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도 몇 년에 걸쳐 일상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기분이 내려간' 시간에는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이 좋다'는 인지가 자리를 잡았고, 같은 시간대라도 교실이 아닌 운동장처럼 활동적인 환경에 있을 경우 딱히 기분 변화가 크지 않다는 것도 다행스러웠다. 약의 힘을 넘어서는 충동적인 모습은 또래들과 대화할 때 외에는 많이 나타나지 않아 어린이집이나 저학년 학교 생활도 무난하게 해왔다. 나와 남편의 아이에 대한 기대치는 언제나 '이탈하지 않고 무사히 뒤따라가는 것'일 수 밖에 없었고 그 이상이면 무엇이든 감사하고 기특했다.
반면, 약 기운이 물러간 저녁에 (특히 저녁식사 후) 무언가를 완성하려면 - 예를 들면 숙제 - 괴로움은 몇 배가 되었다. 아이는 산만함과 자책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울면서 욕하면서 간신히 과업을 끝마치곤 했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화내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그 시간을 같이 견뎌주는 것 뿐이어서, 어디 가지 않고 옆에서 주로 내 할 일들을 했다. 물론 나도 사람이다 보니 온갖 것을 부스러뜨리고 격한 말을 쏟아내는 아이에게 다섯 번에 한두 번은 버럭 짜증을 내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미안해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원망했다. 내가 다시 아이에게 사과하고 어린이는 자라는 중이라 배울 것이 많으니 차곡차곡 연습하면 된다고 다독이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열 살에서 열한 살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사하며, 아이는 더 날 것의 험난한 정글에 던져졌다. 유아기 때부터 같이 자라면서 아이의 특성에 이미 친숙해 있는 한국의 친구들과는 달리, 여기서 5학년이나 되어 처음 만난 또래들은 몹시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아이를 판단했다. 처음 한달은 넒은 대자연과 학교와 여유로운 환경에 신이 났던 아이가, 집에 돌아오면 힘들었던 순간을 토로하는 일이 늘었고 '모두가 나를 무시한다, 없는 사람 취급한다'며 자주 울분을 토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면 Adhd 특성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맥락 없는 말과 행동이 주 원인인 경우가 많았는데, 속상해 하는 아이 앞에서 그 이유가 너에게 있다고 알려주는 건 적절하지 못했다.
불필요한 말들은 가슴에 담아두지 말고 쓰레기통에 버릴 것, 주변의 소리와 방해에 일일이 대응하는 대신 무시하고 할 일을 할 것, 물리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무조건 어른에게 도움을 청할 것, 주변 사람의 비율은 언제나 10%의 절친과 20%의 최악과 70%의 무관심이라는 걸 기억할 것, 대화 내용과 상관 없는 말을 하거나 방금 들은 것도 잊어버리는 게 너의 의도가 아니라는 걸 친한 사람에게는 미리 설명할 것...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최대한 사회적인 상황을 익히도록 돕고 싶었다. 아이 스스로 자신을 설명하면서도 지나치게 감정에 압도되지 않는 연습의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 과정에 부득이하게 상처를 입기도 하겠지만 이를 보살피고 다시 용기를 내도록 분명하게 밀어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이는 학교에서 조용한 고군분투를 하고 나는 집에서 티나지 않는 고군분투를 해왔다.
어젯밤의 대화는 캐나다 이사 후 아이 생활에 대한 나의 고민이 어느 정도 무르익은 때에 아이가 또 자책 섞인 발언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나는 아이가 가진 성향을 Adhd라는 용어와 함께 (어렸을 때 한번 알려준 적 있는) 생각이 뛰어다니는 뇌를 가진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사람보다 순간 집중력이 몇 배로 높아 좋아하는 일은 엄청나게 몰입하는 대신 집중력이 도망가는 것도 순식간이라 잡으러 다니느라 애를 써야 한다고 알려줬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해서 만들어내는 일보다 혼자 바짝 집중해서 완성하는 일이 능력 발휘에 더 좋다는 사실도 얘기했다. 옛날에는 뇌의 생김새와 동작이 다양하다는 걸 알지 못해서 혼이 나고 소외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지금은 의학도 과학도 발전해서 각자의 성향에 잘 맞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도 말했다.
아이의 첫 질문은 "자폐 같은 거야?"였는데, 좋아하는 큐브 선수가 살짝 자폐 증상이 있는 청년이어서 영상 매체를 통해 자폐에 대해 자주 접해서였다. 자폐는 너와 정 반대로 생각이 한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이 필요한 거라고 말해주었다. 자신이 뭔가 의학적으로 명명할 수 있는 Adhd라는 사실에는 조금 놀랐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의심하던 마음이 좀 가시는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순간 집중력이 무슨 초능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본인의 벼락치기 암기력을 자랑할 만한 에피소드를 종알 종알 꺼냈고, 자신의 성향을 제대로 잘 알면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데 유리하다는 내 말에도 공감을 했다.
평소 아이에게 다양성을 설명할 때 항상 얼굴 생김새를 얘기하곤 한다. 이번에도 사람은 생김새가 모두 다른 것처럼 뇌의 모습도 다들 조금씩 다르다는 걸 언급하면서, 혹시 살면서 다른 Adhd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가 너와 똑같을 거라는 전제를 절대 가지면 안된다고 당부했다. 상대적으로 길고 흔들림 없는 집중력이 필요한 한국 사회보다 조금은 더 수용의 범위가 넓은 캐나다로 이사 온 것 또한 우리에게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아이는 납득하는 듯 했다. 물론 학교에서 또 다투고 돌아오면 서울 돌아가고 싶다고 투덜거리겠지만, 어젯밤의 대화 덕분에 아이의 세계관 속에 빠져 있었던 퍼즐 몇 조각은 맞춰진 것 같아서 나도 마음이 놓였다.
이 글 하나에 지난 6년, 아니 아이가 자라온 11년의 사건 사고를 전부 다 적을 수는 없다. 아이의 신체 감각이 평균보다 예민하여 겪어온 일들, 정제되지 않은 아이를 돌보느라 애쓰셨던 제3자들과의 온갖 해프닝, 아이의 틱이 시작된 타이밍과 내가 스타트업으로 넘어온 시기가 맞물려 '대체 엄마의 역할은 무엇인지' 하염없는 고민 속에 내린 막막한 결정들이 차근차근 쌓여 지금에 이르렀다. 유난하다는 말과 방치한다는 말을 동시에 들으며 지내온 몇 년 동안 그래도 나의 가장 잘한 선택은 마지막 순간에 나의 직감을 믿었던 것들이다.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이 나를 많이 바꿔놓았다. 나는 아주 쉽게 취약점을 드러내고 타인의 도움을 구하게 되었고, 사회의 약한 연결고리나 안전망에 더 많이 민감해졌다. 전문가의 의견 듣기를 좋아하면서도 언제나 마지막 버튼은 내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게 되었다. 내 직감은 항상 조금의 욕심도 허용하지 않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런 직감을 의심하며 어떻게든 매달리다 망가뜨린 일은 많아도, 툭툭 털고 내려놓아 잘못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단지 아이를 돌보는 일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지금의 내가 누리는 회사, 동료, 환경 모든 것이 아이 덕분에 내게로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축복과 삶이 있다는 걸 믿으면서도 이 작은 사람이 짊어진 특성 때문에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건 나 아닌가 싶어 가끔씩 울컥한다.
어제 남편과 장거리 통화를 하며 아이가 그래도 아주 심한 편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얘기를 잠시 하다가, 사실은 경중의 정도를 우리가 알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아이는 (아직) 충동성이 폭력으로 표출되지 않고 있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적을 뿐 스스로 얼마나 생각을 자주 놓치는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로 인해 사람 관계가 얼마나 막막한지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다만 아이가 스스로를 싫어하고 미워하지 않도록, 그리고 자신의 특성에 잘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게 부모인 우리가 할 일일테다. 아이가 이만큼 곁에서 지원할 수 있는 부모를 만난 것도, 우리가 이만큼 아이를 이해하며 도울 수 있는 부모가 된 것도 정말 크나큰 행운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 앞으로의 멀고도 험한 길을 가는 동안, 어제의 마음을 기억하고 싶어 기념으로 긴 글을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