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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란 무엇인가

코라의 오래된 편지 - 한계란 어디인가 아님 주의

by 마음씨
2023년 2월 27일 메일리 플랫폼에서 보냈던 편지입니다.


코라예요.


한계 단어 보자마자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연관 검색어로 극복, 돌파, 최고, 무한, 체력, 이런 것들이 주르르 떠오릅니다. 요즘의 저는 그렇게 치열한 개념들을 다시 돌아보고 있어요. 왜 그렇게 맹렬하려고 애를 썼는지, 사실 얻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딱히 맥락은 없는데, 맥주 한캔 칙~ 따야 할 것 같은 그런 생각들이요.



과거를 시간 순서대로 늘어놓고 보면 나름 여러가지 한계를 넘어오긴 했어요.


바이올린 하는 동안에는 0.1%의 재능을 갖지 않더라도 노력으로 탁월함의 어디까지 쫓아갈 수 있는지 정말 여한 없이 해봤습니다. 그러고는 20년지기 악기를 때려친 것도 모자라 건너 건너 테크 스타트업까지 와서 잘 먹고 잘 놀고 일하고 있고요.


평생 사업하는 배우자, 아직 갈 길이 먼 어린이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11년차 워킹맘이기도 합니다. 혼자 집 구하고 업체 구하고 아이 맡기고 하는 이사를 다섯 번도 넘게 했고, 아이 돌봐줄 아주머니 면접은 대략 300명 넘게 본 것 같아요.


1677436371681261.JPG 2012년 카카오스토리에 숨겨져 있는 옛날 얘기들


또 뭐가 있을까요? 귀도 뚫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은데 마취하는 외과 수술을 네 번 했습니다. 아직도 혈관 주사는 싫어요. 운영하던 사업이 어려워질 때는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 덕분에 온갖 집기와 함께 비 오는 날 길바닥으로 끌려난 적도 있습니다.


윗 분이 잘못한 일에 휘말려 경찰청에 검찰에 재판장까지 가 보기도 하고요. 증인으로 선 저에게 판사님이 추가 발언 시간을 주며 하고픈 말 하라고 하셨을 때, 덜덜 떨면서도 한 때 가장 존경했던 리더에 대한 배신감을 쏟아냈던 일은 어제처럼 생생하네요.


아이에게, 배우자에게, 회사에서, 집에서, 예상치도 못한 막막하고 아찔한 일들은 갑자기 그리고 주기적으로 찾아왔습니다. 그 때마다 어찌 어찌 견뎌내며 여기까지 (캐나다까지!) 왔죠 ㅎ


딱히 뭔가 도전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다짐하며 지내본 적은 없습니다. 그냥 고비마다 밀려 쓰러질 수는 없어서 꾸역꾸역 버텼고, 최상은 커녕 최하만 아니면 좋겠다 생각하며 한계의 능선을 간신히 기어서 넘었어요. 대신 절실하게 제 '한도'를 깨달았습니다.


1677436769637220.jpg 암흑기를 막 탈출할 무렵 발표 자료, 당당하게 #자체소속 이라고 써보았다


왜 이번 편지가 한계 한도 어쩌구 저쩌구 하냐면, 여기 온지 꽉 채워 2개월이 지나가니까 슬슬 한도가 찰랑 찰랑 차오르는 것이 느껴져서요. 용량 거의 다 채웠다는 빨간 불, 더 이상 결제할 금액이 안 남았다는 한도 초과 메시지.



저는 새로운 것이 주는 자극을 좋아합니다. 엄청난 최신기술 말고, 가까이 있는데 미처 몰랐던 것을 만나는 거요.


그래서 다가오는 일들을 큰 고민 없이 덜컥 받아들곤 했습니다. 덤벼라 세상아, 뭐 이런 태도는 아니지만, 한계를 넘는 기쁨이란 건 있었어요. 차근차근 퀘스트 깨면서 무한 확장을 하고 싶었습니다. 깊은 한우물이 되기를 포기했으니, 대신 끝없이 넓혀가보자.


그런데 사람도 신용카드처럼 한도가 있더라고요.


매일 1만원 정도 쓰던 사람이 한 번에 1백만원 결제를 하려면 심리적 한계를 넘어야 합니다. 그래도 카드 한도가 1천만원이라면 그냥 '큰 마음' 한번 먹고 하면 돼요. 1백만원 팍 긁으면서 생전 처음 짜릿함도 느낄 수 있겠죠! 하지만 어느 순간 한도를 초과하면 결제 자체가 막힙니다. 아예 동작하지 않아요.


꾸준히 오래 가려면 무리하지 않고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두 가지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내 눈 앞에 보이는 장벽이 그동안 익숙했던 한계인가, 아니면 한도인가. 그리고 지금 내게 남은 잔여 한도는 얼마인가, 과연 한도가 남아있기나 한가.


스스로를 파악하는 감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떡이 아니고, 치이고 깎이며 경험으로 쌓아야 하는 것이어서 어렵습니다. 아프기도 엄청 아프고 지나고 나야 알게 되는 것도 정말 정말 많습니다.


1677437151584736.jpg 현재 박스 개봉률 20%


지난 2주 정도는 오래간만에 제 한도의 끝에 거의 다다른 걸 실감하며 하루 하루 넘겼습니다, 행여나 초과될까 조마조마 하면서요. 계약한 집 열쇠 받은 날, 서울에서 짐 들어온 날, 나머지 가구를 위해 실측하고 인터넷 신청한 날, 박스 1/4 간신히 오픈해서 정리한 날이 모두 따로 따로인데요, 그 사이에 (100% 제가 라이드 하는) 아이의 일정 변경이랑 회사에서의 인터뷰 프로젝트가 겹쳐 잠깐 숨쉬기가 어려웠어요 하하하


그래도 3월에는 인스타 스토리에 새로 이사한 집 한바퀴(?) 보여드리고 싶은데 가능할까 모르겠네요.


여기서 스스로 기특한 포인트 하나 자랑하자면요, '고객님 지금 한도에 거의 도달했습니다'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보내고 대비책을 마련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성장했다는 것!



마지막 덧붙임 -

이 편지는 분명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잘 안 써지는 편지였어요. 그래서, 척 하면 착 해주실 고마운 분들에게 기대어 얼기설기 담아 그냥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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