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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씨 May 14. 2020

작가의 서랍를 정리하며

꽤 어릴 때부터 나는 말보다 글, 사진보다 글, 영상보다 글이 편안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기록하기 트렌드 열풍이 불기 전 일종의 일기의 연장선상으로 글을 통해 나를 쌓아야겠다 결심했다. 대부분이 하는 흔한 루트를 밟았다. 페이스북, 인스타, 네이버 블로그 그리고 브런치까지. 다행히 초창기에 네이버 블로그 글과 페북 글 몇 개를 발판삼아 브런치 작가 등록이 이미 되어 있었던 나는 최근 쟁쟁한 분들이 어째서 브런치 작가 등록에 그리 낙방하는지 모르겠지만 (흑흑) 아무튼 '결심만 하면' 제대로 무언가 보여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구에게, 무엇을 보여준단 말이지? 나의 하찮은 글들은, 손으로 끄적이던 일기장에서 싸이월드를 넘어서 조금 더 공개된 낙서와 메모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론 한때, 읽어주는 사람들이 분명하고 목표가 확실하던 어떤 시절 밤을 꼴딱 새워가며 매일같이 장문의 글을 쏟아내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의 결과물은 사실 어느 날 갑자기 떠난 MT에서 모닥불을 보며 밤새 지치지도 않고 소곤대던 이야기와 같은 것들. 매일 꾸준하게 이어질 수 없는 글들이었다. 


일상이 안정될수록 글을 쓰기 어려워졌다. 떠도는 생각, 놓치기 아까운 대화, 기억했다 발전시키고 싶은 이야기들은 쉴새없이 나를 통과해가는데 그걸 그냥 보내고만 있었다. SNS가 나를 한 조각 삼켰고 아이가 나를 한 조각 떼어갔고 살림과 출근이 나를 한 쪽씩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기엔... 나보다 백배 더 바쁜 분들도 충실하고 꾸준하게 (그리고 꾸역꾸역) 생각과 고민의 알맹이들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이제 '당연'해진 시대가 되었는데. 나는 되던 것도 안되고, 하려던 것도 못하고, 나 자신에게도 계속해서 결심의 공수표만 날린 채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여기까지 왔다.


이런 저런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전처럼 찐득하게 내가 들어간 글이 써지지 않았다. 기록이든 소설이든 단상이든 비난이든, 아무것도 쥐어지는 게 없었다. 100일 중 90%의 글을 써내던 때가 거짓말인 것처럼 두번째 백쓰를 중도하차 하지 않나, 내가 주도해서 열어놓은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서 운영만 하고 글은 1도 생산하지 않지 않나... 남들 다 쓴다는 메모앱 기록앱 노트앱 방황도 해보고 글이 안 써지니 필사도 하고 해봤지만, 참말로 알맹이들은 내게서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내놓을 알맹이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실은 어제) 올해 들어와 틈날 때마다 제목이라도 적어두려고 저장해 두었던 작가의 서랍 조각글들을 훑어보고 대부분을 지웠다. 코로나를 상상도 하지 못하던 시절에 써둔 그 작은 생각들이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꿈과 희망에 부풀어 휴직을 기다리고 있거나, 지나온 일들을 회고하며 앞일을 그려보고 있거나, 아무튼 지금의 막막함과 전혀 손발이 맞지 않는 것들은 아낌없이 접어 삭제하였다. 이사하며 쓰레기를 거의 1000리터 가까이 버려서 그랬을까? 휴지통 클릭이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았다.


버렸으니 채우기 시작해야지. 없어서 꺼내지 못했다고 믿으려고 한다. 아직 덜 익어서, 아직 더 여물어야 해서. 나를 담은 내 것들은 이제 준비가 될 것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정신없는 일상에 나는 나를 많이 빼앗기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제 시간이 주어졌으니, 충분히 이 안에서 (이사한 집을 근 4년 만에 내 손으로 하나씩 버리고 치우듯이) 나를 살피고 정리하면서 나다운 모습으로 조금씩 청소해야겠다. 그 흔적과 과정이 글이 되고 기록으로 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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