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이가 들면 LP판 노이즈도 즐기게 된다

최갑수의 〈기막히게 좋은 것〉을 읽고서

by 권성권
k482036377_1.jpg


지난주에는 봉고를 몰고 목포에서 천안까지 먼 길을 다녀왔어요. 더욱이 그날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이라 무서움마저 들 정도였죠. 그래도 딸 아이가 대학교에서 짐을 빼야 하는 상황이라 안 가면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4학년 1학기까지 기숙사에서 잘 지내왔는데, 2학기 땐 실습을 해야 할 상황이라 8개나 되는 짐 상자를 빼야 했으니까요.


사실 딸아이의 짐을 빼는 것보다 내 마음속에는 더 무거운 짐이 내려 앉아 있었어요. 딸아이가 대학을 졸업하면 앞으로 직장을 잡아야 할 텐데 무얼 하도록 하면 좋을까? 딸아이는 자기 진로를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 걸까? 이 땅의 모든 부모가 이고 있는 짐이듯이 나도 그런 짐을 머리에도 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천안 순댓국집에서 점심을 먹는 딸아이의 모습은 너무나 해맑았어요. ○○전기 회사에 6개월간 실습을 나가는 게 꿈 같은 일이라면서 말이죠. 자신을 아는 후배들도 늘 놀고 다니는 선배인 줄 알았는데 그 회사에 실습을 나간다니 모두 놀랐다는 거예요. 그때 나도 깨달았죠. 내가 딸아이의 인생에 목말라 한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게 아니란 걸 말이죠. 목적지를 정해 놓고 발버둥 치게 하는 것보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지금 주어진 상황에 즐기면서 살도록 하는 게 최선이겠다 싶은 거죠.


“우리 삶은 CD가 아니라 LP판 같습니다. LP를 듣다 보면 미세한 노이즈가 끼어 있는 걸 알게 되죠. 그런데 자꾸 듣다 보면 이 노이즈가 오히려 매력적으로 들린답니다. 배우 K형님도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이가 들면 이 노이즈를 즐길 줄 알고 사랑하게 되죠. 노이즈가 없으면 재미가 없어요.’”(107쪽)


최갑수의 〈기막히게 좋은 것〉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젊었을 땐 노이즈가 있는 게 부끄럽고 싫었지만 나이 들수록 잡음이나 소음이 인생에 즐거움을 더한다는 거죠. 인생에 찾아오는 기쁨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평범한 순간 속에 깃들어 있다는 뜻이에요. 행복은 매일매일 마주하는 작은 것들과 따뜻한 한 끼 식사와 소소한 순간 속에 담겨 있다는 거예요.


한국을 대표하는 여행 작가이자 세계 곳곳을 누빈 그는 현재 50이 넘은 세월을 살고 있어요. 30대의 그는 ‘영감’으로 글을 썼고 40대는 ‘마감’으로 썼는데 지금은 ‘기력’으로 쓴다고 하죠. 젊을 땐 시간에 쫓기며 목적지만을 향해 달렸지만 지금은 도로 옆 풀꽃과 카페도 즐기면서 산다고 하죠. 더욱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대략은 알게 된다고 해요.


실은 나도 그런 것 같아요. 오십 중반을 살고 있는 나로서도 예전에는 목적지만을 향해 물살을 거슬러 노를 저으면서 산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조용히 노를 거두고 시간이라는 물살에 올라탈 때도 많아요.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어느 순간 노를 저어야 할 때가 왔다는 걸 알 때가 있고요. 내 딸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 줘도 지금은 이해하기가 어렵겠죠?


이 책에는 ‘행복에 관한 단서’가 곳곳에 숨어 있어요. 좋은 물건을 아끼지 않고 바로 사용하는 것.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채소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 골치 아픈 일은 시간에 맡기고 한 걸음 물러나는 것. 질투는 내려놓고 과한 열정은 다그치지 않는 것. 매일의 루틴처럼 그도 산책 코스를 즐기는데 그렇게 걷다 보면 머리도 맑아지고 복잡한 문제도 정리가 된다고 하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우리말 ‘목마르다’로 번역된 헬라어 ‘딥사오’(διψάω)는 ‘갈급하다’는 뜻이에요. ‘갈증’을 뜻하는 ‘딥소스’(δίψος, 고후11:27)에서 파생된 단어죠.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군중에게 육체적인 갈증은 영생의 목마름을 채울 때 해소된다고 말한 거예요. 스스로를 ‘평생 우물 파는 사람’이라고 했던 어어령 교수도 부귀와 명예와 공명으로 채워지지 않던 목마름을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채웠다고 했어요. 그분을 통해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걸(요:37-39) 직접 체험한 거죠.


사실 영생의 목마름을 해소한 자들은 이 땅에 크고 작은 일들도 초연할 수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딸아이의 취업도 내가 목말라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실습하는 현장에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게 최선이듯 말에요. 젊을 땐 시간에 쫓기며 목적지만을 향해 달렸던 최갑수도 지금은 도로 옆 풀꽃과 카페도 즐기면서 산다고 하니까요. 노이즈가 낀 LP판 인생도 영생의 관점에서는 크게 문제될 것도 없겠고요.


최갑수는 그 책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가 한 말을 전해 주고 있어요. 가즈오는 3년이나 5년 후의 일은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1년 단위로만 경영 계획을 세웠다고 말이죠. 고(故) 박영석 대장도 높은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1미터 앞만 보는 거라고 말했다고 해요.


최갑수도 그래서 매일 새벽에 글을 써서 아침 8시에 뉴스레터처럼 독자들에게 보내고 있는 걸까요? 1,000매를 쓰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매일 3매를 쓰는 건 어렵지 않다면서 말에요. 그의 모습처럼 작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나누는 기쁨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기쁨이요 기막히게 좋은 삶이지 않나 싶네요.


keyword
이전 06화패시브 인컴 만들어 청부(淸富)로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