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환경에서 그걸 응시하며 기쁨을 누린 그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by 권성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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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좋다는 당근을 직접 키워서 먹고자 예배당 옆 작은 텃밭에다 씨를 심었어요. 깨를 벤 펑퍼짐한 그 자리에 그대로 심었었죠. 그날 이후 두 차례 비가 왔고 싹도 올라왔어요. 나는 그게 당근 새싹인 줄 알고 동네방네 떠들썩하게 자랑했어요. 하지만 주변 분들은 그게 당근 싹이 아니라 깨 싹이 다시금 올라온 거라고 말해줬어요.


그 후 고추와 가지를 뽑은 밭 자리에 이랑과 고랑을 만들었어요. 작게나마 솟아오른 그 이랑에다 당근 씨앗을 다시금 심었어요. 그랬더니 1주일 지나 그곳에도 싹이 올라오는 게 보였어요. 앞서 깨밭에서 올라온 새싹과는 달랐죠. 깨 싹은 이파리가 넓적한 활엽수 같았다면 당근 싹은 침엽수처럼 뾰족했으니까요.


왜 깨를 베어 낸 자리에 당근 싹이 올라오지 않았던 걸까요? 이전에도 마늘과 양파를 심으면 잘 자란 밭 자리였는데 말이죠. 이랑과 고랑을 만들지 않은 차이였을까요? 양파나 마늘처럼 당근도 같은 뿌리 식물이긴 해도 이랑과 고랑이 깊을수록 더 깊게 뿌리 내리는 그런 이치 말에요. 생각할수록 신비로움 그 자체였어요.


뭐든지 봉우리가 높으면 그 골도 깊은 법이라고 하죠. 인생에 큰 성과를 거둔 이들은 그만큼의 고난도 많이 겪었다는 것 말예요. 버섯과 약초도 골이 깊은 산속에서 자란 것이 맛과 향도 훨씬 좋다고 하죠. 그러니 지금 험한 산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머잖아 산봉우리도 볼 수 있겠죠. 지금 처한 자리에서 그런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응시하다 보면 뭔가 새로운 길도 보일 테니까요.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은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건 좋다’, ‘이건 나쁘다’ 또는 ‘이건 가, 나, 다를 의미하는 바로크 시대 그림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상적으로는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114쪽)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에 나오는 말이에요. 예술가의 작품을 바라볼 때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죠. 그 작품이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말에요.


사실 그는 〈뉴요커〉 잡지에서 일한 엘리트였어요. 형이 암 투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삶의 의미를 잃었죠. 그 후 도피하듯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으로 10년간 일을 했죠. 그 시기에 틈틈이 마주한 예술 작품과 다른 경비원들의 삶을 통해 자기 내면을 성찰케 된 거예요. 그만큼 이 책은 예기치 못한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걸음을 멈춘 이들에게 묵직한 사색과 통찰을 안겨주고 있어요.


실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전 세계의 5천 년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200만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한 곳으로 알려 있어요. 그중 일부만 상설 전시되거나 특별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공개되죠. 드로잉 및 판화만 해도 120만 점을 소장할 정도로 컬렉션 규모가 엄청나다고 하죠. 브링리 작가가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느꼈던 압도감도 그런 무한에 가까운 규모에서 비롯된 거였죠.


그중 고전기 그리스 조각상의 로마 시대 모작 〈메디치 아테나〉는 몸통이 유실된 채 두상만 남아 있는 작품이에요. 브링리는 그를 통해 결핍 속에서도 존재하는 아름다움 자체를 느꼈다고 해요. 16세기 중앙아시아 〈더비시의 초상화〉는 고행을 수행하는 인물을 그린 작품이죠. 그는 더비시의 수행과 자신의 경비원 생활이 맞닿아 있는 깊은 몰입감을 경험했다고 해요.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그리스도의 애도〉는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님의 시신을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요한 등이 둘러싸고 슬퍼하는 그림이죠. 그는 작품 속 인물들의 얼굴과 몸짓에 나타난 원초적인 상실감을 바라보며 그 스스로 위안을 얻었다고 하죠.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


구약의 시편 말씀인데 ‘다윗의 시’죠. 젊은 날 다윗은 행악자들과 불의를 좇는 이들 앞에서 많은 수모를 겪었는데 그 인생의 경험자로서 다음 세대에게 교훈을 주고자 쓴 시로 알려 있어요. 그는 15살 무렵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골리앗을 죽인 후 10년간 도망자로 살았죠. 그야말로 골이 깊은 삶이었어요. 그렇게 쫓기는 삶 속에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는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죠.


여기에 ‘기뻐하다’는 히브리어 ‘아나그’(עָנַג)는 ‘부드럽다’ ‘섬세하다’는 뜻도 있어요. 다윗은 하나님으로 인해 그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섬세하게 발견코자 한 거죠. 그만큼 그는 외적인 환경이나 상황을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한 게 아니었어요. 기구한 운명 속에 태어나 도망자로 살기까지 인생의 깊은 골짜기를 걸었지만 충분자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섬세한 기쁨을 발견코자 한 거죠. 패트릭 브링리가 미술관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그 작품들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은 것처럼 말이죠.


패트릭 브링리에게 예술은 잠시 멈춰 경배할 경외감과 분주함 속에서 잃어버린 삶의 리듬을 되찾게 한 매개체였어요. 수천 년 된 유물 앞에서 자신의 유한한 고통을 내려놓고 치유 받는 시간이었고요. 경비원으로 일하며 마주한 동료와 관람객들에게 예술은 경쟁상대가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임을 알았죠. 더욱이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다시금 세상으로 나아갈 자양분을 얻게 하는 힘이었고요. 그런 환경에서 그걸 응시하며 기쁨을 누린 그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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