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끝에 걸려 있는 듯 위태롭게 세워진 암자가 하나 있어요. 그 모습이 너무 옹색하지만 나름대로 여유를 느끼게 하죠. 전각 왼쪽의 바위에 기대고 있는 팽나무도 마찬가지예요. 그 고목이 바위에 몸을 기댄 채 이파리를 하나둘 달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깊은 운치를 느낄 수 있죠.
땅끝마을 해남 달마산 정상에 자리한 도솔암이 그렇죠. 손바닥만한 작은 마당과 주변에 솟아오른 바위들이 그 암자를 감싸고 있어요. 그곳 마당에선 가깝게는 어불도가 보이고 그 너머 진도까지도 또렷하게 보이죠. 2023년 가깝게 지낸 분과 함께 그곳을 올랐었죠. 해남에서 최고로 친다는 도솔암 일몰까지 봤다면 내 영혼도 더 새롭게 깨어나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그 후 108계단을 걸어 미황사에 들렀고, 그곳을 지나 ‘남도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달마산 정상까지 올라갔어요. 달마산은 한반도의 산줄기가 바다로 떨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솟아오른 봉우리라고 하죠. ‘달마’는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에서 온 말로 ‘진리’를 뜻한다고 해요. 달마산은 ‘불상과 바위와 석양빛’이 조화를 이루는 ‘삼황(三黃)’의 아름다움이 깃든 곳이라고 하죠.
그 길을 순례길처럼 한 바퀴 돌았더니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왠지 모를 포근함이 밀려들었어요. 봄과 여름엔 짙은 녹음을 발산하는 동백나무와 소나무 숲 향기를 들이마실 수 있고, 가을과 겨울엔 붉은 단풍과 흰 눈으로 뒤덮인 산세의 황홀경에 취하게 되죠. 그곳에 머무르면 인간은 대자연의 하나로 깨어날 수 있고요.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110쪽)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안인희 옮김·문학동네·2020)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아프락사스(Abraxas)란 고대 영지주의에서 나오는 신의 이름이죠. 선과 악, 빛과 어둠, 신성과 악마성을 모두 포괄하는 양극의 통합을 상징해요. 인간 자체도 그런 대립적인 요소를 품고 있는 존재라는 거죠. 인간은 알이라는 관습의 틀을 깨트린 채 내면의 성찰을 얻어야만 새로운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죠.
독일 태생의 헤르만 헤세는 1912년 35세에 스위스 베른으로 이사했어요. 1919년엔 스위스 남부 티치노 주의 몬타뇰라로 옮겼고, 1923년엔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했죠. 1962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43년간 스위스에 산 거죠.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전쟁 찬동 분위기 속에서 그는 평화주의자를 고수하고자 ‘제 둥지를 헐뜯는 자’라는 별명을 얻으면서까지 스위스로 떠났죠. 더욱이 가족 문제와 부인의 정신 질환도 겹쳤으니까요. 그는 독일의 가이엔호펜에 살던 시절(1904~1912년)부터 화가들과 교류했는데 일생토록 3000여 점의 그림을 그린 것도, 출간한 화가로 주목을 받은 것도 그런 연유였죠.
1919년 가족과 떨어진 헤세는 몬타뇰라의 ‘까사 카무찌’라는 러시아풍의 아파트를 임대해 살았다고 해요. 거기서 살면서 남부 루가노의 호수와 풍경을 접하면서 창작에 몰두했고요. 그의 대표작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1920), 〈싯다르타〉(1922),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유리알 유희〉(1943)도 그때 쓴 작품들이죠.
물론 〈데미안〉은 1917년 스위스의 베른에서 쓴 것인데 1919년 독일에서 출판됐죠. 1차 세계대전 직후 혼란한 시기에 그는 책 속의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어요. 그 책은 전쟁의 상실감과 정신적 공황에 빠져 있던 독일 청년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죠. 전쟁터에 나선 독일의 젊은이들조차도 군복 포켓 주머니에 그 책을 한 권씩 넣고 다닐 정도였죠. 전쟁으로 흔들리는 세상에서 균형을 잡고 사는 법을 그 책이 일깨워줬고, 자신이 내딛고 살아야 할 공간을 스스로 찾게 해 준 까닭이었죠. 알에서 깨어난 새가 내다 볼 세상이 그랬으니까요.
스위스의 티치노를 여행하는 여행객들은 헤세의 박물관에 들러 그의 타자기와 책과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겠죠. 해발 467m 고지의 몬타뇰라는 ‘황금의 언덕’이라 불릴 만큼 경치가 일품이라고 하죠. 그 언덕에서 가장 높은 곳에 헤르만 헤세가 살던 집이 있고요. 그런데 티치노에 가면 ‘제네로소 산’도 올라가도록 추천한다고 해요. 그곳은 해발 4800m의 몽블랑과 비교하면 1704m로 만만하지만 정상에 서면 루가노 호수와 생 조르조 마을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관할인 코모와 바레즈까지 볼 수 있다고 하니까요. 그 정상도 톱니바퀴 산악열차를 타고 갈 수 있고요.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13:11)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끝무렵인 고린도에 머물 때 자생적으로 세워진 로마교회를 향해 쓴 편지죠. 당시 로마 사회는 다신교였고 황제 숭배가 강했죠. 더욱이 로마 사회는 세속적인 쾌락을 즐겼고 권력 중심에 서려는 움직임이 강했죠.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재림을 내다보며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권한 것이죠.
여기에 ‘시기’는 헬라어로 ‘카이로스’(καιρός)에요. ‘시간’이나 ‘때’로 변역되지만 인간이 임의로 정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죠. 오직 위로부터 주어지는 시간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향하던 바울에게 느닷 없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온 그런 때 말이죠. 기암괴석이 우뚝 솟아 있고 드넓은 바다가 펼쳐 보이고 황홀한 노을이 펼쳐지는 그런 산속에서 참된 빛의 깨달음을 얻는 때 말이죠.
해남 달마산은 불상과 바위와 석양빛이 조화를 이루는 삼황(三黃)의 황금빛으로 유명하죠. 도솔암 일몰도 남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금빛 장관을 연출하고요. 그곳은 심신이 지친 헤세가 황금빛으로 물든 몬타뇰라 언덕에서 많은 위로를 받고 새로운 영감을 얻은 곳과 비길 수 있겠죠. 매서운 추위가 불어 닥치기 전에 저마다 석양의 황금빛 산속에 올라 헤세가 되어 보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