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착 달라붙는 슈트를 입어야 당당함이 살아난다

이정민의 〈밀라노, 이곳에서 나는 영원히 시작이다〉를 읽고서

by 권성권
8959136948_1.jpg 책겉그림



이틀 간격으로 울 엄마가 두 번이나 그 일에 대해 내게 전화해 왔어요. 집에 있는 무스탕을 민주 엄마에게 주고 싶다고 말이죠.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색깔이 고동색이라 오십에 들어선 아내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죠. 그래도 시어머니가 생각해서 막내며느리에게 물려주는 것이니, 잘 맞을 거네, 하고 맞장구를 쳤어요.


나이 들어 점차 기운이 빠지면 젊은 날 꽉 끼던 옷들도 헐렁해지는 법이죠. 구십이 세에 접어들어 뼈들이 앙상하기 시작하면 그 어떤 옷을 입어도 맵시가 살아날 수 없고요. 오리털 이불을 덮어도 피부의 살점이 닳고 없어져 온몸의 온기도 붙잡아 주질 못하는 법이니까요.


그런 날이 오기 전, 좀 더 젊은 날 울 엄마는 어떤 옷을 입고 살았을까 생각해 봤어요. 울 엄마는 젊은 날부터 유모차를 끌고 들판을 다닐 때까지 온종일 논밭에서 뒹굴었어요. 5일 장이 서던 지도읍 장날 도라지를 캐서 머리에 이고 나가 판 돈으로 겨우 산 것도 헐렁한 몸빼 바지였고요. 나머지 돈은 아끼고 아껴 홀로 키우는 자식들을 위해 써야 했죠. 실은 그런 옷을 입고서도 당당하게 살았었죠. 그러다 자식들이 혼인할 때가 되면 그때서야 제 몸에 맞는 고운 한복을 맞춰 입었었죠.


“슈트는 편하게 입는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남성미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정장이다. 어깨는 딱 맞아야 하고, 재킷의 소매통은 적당히 좁아야 하며, 소매 길이는 셔츠 소매가 조금 보일 정도로 짧아야지 헐렁하게 길어서는 안 된다. 재킷의 허리선도 잘 맞아야 하고 바지도 벙벙하지 않고 슬림하게 맞아야 한다.”(184쪽)


이정민의 〈밀라노, 이곳에서 나는 영원히 시작이다〉에 나온 이야기예요. 한국 남성들이 슈트를 입으면 아저씨티가 나는 이유가 있다는 거죠. 대부분 한 사이즈나 두 사이즈 큰 걸 선택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만큼 어깨가 딱 맞고 헐렁하지 않아야 남성미가 살아난다는 뜻이죠. 더욱이 슈트와 어울리는 양복바지를 입어도 그 무릎도 튀어나온 걸 입고 다닌다고 하죠. 물론 그것은 한국 음식점의 방 문화 영향이 크다고 해요.


사실 그녀는 1993년 25살의 나이에 500달러를 들고 이탈리아로 떠났어요. 밀라노 에우로페오 디자인 대학을 거쳐 도무스 아카데미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죠. 졸업 후 이탈리아 명품 루이자 베카리아에 인턴으로 입사해 3년 만에 컬렉션 책임자가 되었고요. 2003년 제일모직에 영입돼 최연소 여성 임원으로 밀라노 법인 브랜드도 런칭했죠. 현재는 ‘Mina J Lee’를 런칭해 독자적인 디자이너 길을 걷고 있고, 아동복과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by BE’도 운영하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한다고 하죠. 이 책은 그간의 과정을 담은 에세이집이에요.


그녀가 그 책에서 그런 말을 해요. 독일인들은 수입의 6퍼센트를 자신을 꾸미는 데 쓰고, 이탈리아인들은 수입의 23퍼센트를 쓴다고 말이죠. 그렇다고 카드빚을 내서 명품을 사는 건 절대 없고 예산이 허락되는 범위 내에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걸 찾아 즐긴다는 거죠. 그만큼 이탈리아 사람들의 자신감과 자연스러움은 명품 가방이나 유명 브랜드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해요. 오직 그들 스스로의 당당함에서 나오는 거라고 하죠.


그래서 밀라노 한 카페에서 바라본 할머니 두 분이 멋졌다고 하는 걸까요? 밀라노는 파리나 로마나 피렌체에 비하면 작고 침침한 도시지만 그 카페에 들어선 두 할머니는 너무나 당당했다고 말이죠. 일흔이 돼 보이는 키 큰할머니는 짙은 청록색 정장에다 금발의 단발머리에 오래된 구찌 백을 들고 들어섰는데, 뒤따라오던 아흔 살 할머니는 금발에 황색 정장에다 1930년대풍 반지를 여러 개 끼고 있었다는 거예요. 나중에 말하는 걸 들으니 금발의 그녀들은 모녀 사이였다고 하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2천 년 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이 입어야 할 옷에 대해 권면한 말씀이죠. 로마 시내 사람들이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의 옷을 입고 살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이죠. ‘입는다’는 헬라어 ‘엔두오’(ἐνδύω)는 ‘-안에’를 뜻하는 ‘엔’(ἐν)과 ‘들어가다’는 ‘뒤오’(δύνω)의 합성어에요.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걸 뜻해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신’ 히브리어 ‘라바쉬’(לָבַשׁ)와 같아요. 그들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무화과 잎을 엮어 수치를 가렸죠. 그것이 인류 최초의 옷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 옷은 시간이 지나면 마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짐승의 가죽옷으로 감싸주신 거였죠.


그것은 집 나간 탕자에게 보여준 아버지의 사랑도 똑같아요. 아버지 재산을 모두 탕진한 그 아들이 늦게라도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도 잡고 잔치를 벌였죠(눅15:22∼24). 사탄은 지금도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 그리스도인을 비난하고 정죄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품 안으로 들어오는 자녀들은 언제라도 새 옷을 입혀 주시는 분(슥3:1-5)이에요. 어린애가 밥을 먹다가 옷이 지저분해져도, 밖에서 놀다가 옷이 더러워져도, 부모는 언제나 새 옷으로 갈아입히듯 말이죠.


울 엄마가 전화 마지막 부분에 한복 이야기도 했어요. 한복도 한 벌 남아 있는데 민주 엄마 갖다 입을래, 하고 말이죠. 어쩌면 아직도 나를 철부지로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밥을 먹거나 밖에 나가 놀다가 옷이 지저분하고 더러워지면 그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 주던 그 시절의 모습처럼 말이죠. 엄마들은 모두 그런 사랑의 옷을 자식에게 입혀주며 살아왔죠.


이제는 어린 시절의 철부지 옷을 벗고 당당한 나만의 옷을 입고 살아야 할 때에요. 가끔은 정장을 입을 때가 있는데 거기에 슈트를 걸치기도 하죠. 며칠 전 슈트를 선물하려는 분이 있는데 이제는 어깨선이 살아나고 몸에 착 달라붙는 슈트를 입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슈트는 노년에 들어서도 당당함이 살아나겠죠. 더욱이 그리스도인다움의 옷(계19:8)을 입고 당당하게 사는 것도 중요한 일일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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