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쾌적하지만은 않다

김기석 목사의 〈고백의 언어들〉을 읽고서

by 권성권
k502939242_1.jpg 〈고백의 언어들 - 나의 인생, 나의 하나님〉


엊그제 신년하례회가 있었어요. 그 모임에서 올 6월에 은퇴를 앞둔 목회자가 그런 말을 했죠. 은퇴할 나이가 되니까 이제야 목회가 보이는 것 같다고 말이죠. 자신의 뒤늦은 후회라기보다 아직 기회가 많은 젊은 목회자들에게 호소하듯 들렸어요. 남은 날을 계수하며 더 신실하게 목회하라고 말에요. 그럴 때 “천 가지 좋은 일이 구름처럼 몰려든다”(千祥雲集)고 하죠.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만큼 말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삶으로 겪은 후 되새김질한 것만큼요.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체험도 다르지 않겠죠. 하나님을 경험한 것만큼 말하고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꼴이죠. 이단과 사이비도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목회 은퇴를 앞두고 자신이 여태 만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은 그만큼 신중할 일이에요. 그 고백이 사상누각처럼 뜬구름 잡는 거라면 실망할 수밖에 없고요. 하지만 인생의 길에서 직접 겪은 고백이라면 적잖은 울림을 안겨 줄 거에요. 인생의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시원한 생수가 될 것이고,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이들에겐 영생의 창문을 여는 일일 수 있죠.


“편협한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이해의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지 않는 이들은 무조건 틀렸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단들은 우리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거미줄 같은 가르침 속에 사람들을 끌어들여 결국 그들의 내면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사회적 자아가 파괴되어 외부의 사람들과 소통할 능력을 잃어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270쪽)


김기석 목사가 쓴 〈고백의 언어들〉에 나오는 말이에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전부라고 고집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사람도 없다는 뜻이죠. 그걸로 올가미를 쳐 놓고 숨통조차 조인다면 그거야말로 폭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그런 신앙심은 무속과도, 이단과 사이비와도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에요.


이 책은 그가 목회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하나님과 동행한 시간을 돌아보며 쓴 회고록이라 할 수 있어요. 청년 시절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첫발을 들여놓던 그 기억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향한 지평이 얼마나 넓어지고 깊어졌는지를 진솔하게 돌아보는 고백을 담았으니까요.


물론 이 책에는 인문학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숨결을 읽어주고 해석해 주기도 해요. 나이 들수록 성경 한 권만 강조하는 이들이 있는데 왜 그런 텍스트들을 곁들여 말하는 걸까요? 인문학을 소홀히 하면서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만용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성경으로만 이 세상에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과 같은 다양한 분야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소통하시는 분이라는 뜻이죠.


그렇다고 그가 고백하는 언어들이 전부 글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에요. 오히려 길에서 나온 언어들이 훨씬 더 많아요. 그만큼 이 책은 삶의 이정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청년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거친 질문을 고요한 깨달음으로 안내해 주는 잔잔한 목소리가 실려 있어요. 신앙의 이름으로 무지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세력의 어리석음도 꾸짖는 강인한 목소리도 담겨 있고요. 더욱이 진리에 목마른 이들에게는 촉촉한 이슬비처럼 스며들게 하는 진솔한 목소리도 들어 있죠.


엊그제 갑자기 목포에 폭설이 내렸어요. 그날 전국적으로도 많은 눈이 내렸겠죠. 아침에 운전대를 잡았을 때 세상이 온통 하얀색이었어요. 검은색보다야 좋긴 했지만 온통 세상이 하얗다 보니 내 생각도 순간 하얗게 되는 느낌이었어요. 그때는 내가 안다고 하는 것들도 모른 게 되고, 맛있다고 느낀 것들도 맛없는 것이 되고 말죠. 내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조차 희미해지고요. 흑과 백은 그래서 조화를 이뤄야 하는 것 같아요. 신앙도 깊은 어둠과 회의를 통과해야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고요.


그처럼 끝없이 확산되는 세계 속에서 나의 작고 초라함을 알게 돼요. 그때 비로소 연약한 내가 하나님의 신비 앞에 서서 경외심을 느끼는 법이죠. 그만큼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쾌적하지만은 않아요. 때로는 너덜너덜한 바위를 걷기도 하고, 어떨 땐 벼랑 끝에 내몰리는 위태로운 길을 걷죠. 하지만 그런 길들을 회피하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죠. 예수님도 그래서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한 것이죠.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9:12-13)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망해 포로로 끌려갈 때 예레미야가 외친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들에겐 재앙이었지만 하나님은 평안이요 미래와 희망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를 통해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니까요. 그들이 바벨론의 그발 강에서 해야 할 일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는 거라고 선포한 거죠.


여기에 ‘부르짖다’는 히브리어 ‘카라’(קָרָא)는 ‘울부짖다’는 뜻이에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게 되죠. ‘기도하다’는 ‘팔랄’(פָּלַל)은 ‘중재하다’ ‘판단하다’는 뜻이에요. ‘팔’은 ‘입’을 형상화한 것이고 ‘랄’은 목자의 지팡이를 형상화한 거예요. ‘팔랄’이란 ‘권위자를 향해 말한다’는 뜻이죠. 일부 학자들은 ‘팔랄’이 ‘쪼개다’ ‘재판하다’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해요. ‘쪼개다’는 건 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의미겠죠. ‘재판하다’는 건 ‘자기 문제의 판단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이고요.


모든 종교는 기도를 강조하죠. 하지만 무당의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에는 차이가 있죠. 무당은 오직 자기 자신을 강화하기 위해 기도할 뿐이에요. 신앙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복종시키는 기도를 하죠.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말이죠. 갈멜산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보여준 기도가 무당같은 기도였다면 엘리야가 보여준 기도는 참된 신앙인이 본받아야 할 기도였죠.


목회 현역에서 은퇴한 김기석 목사는 이번에 나온 책이 신앙인들에게 작은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해요. 그만큼 젊을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경험한 하나님의 세계가 얼마나 깊어졌는지 진솔한 고백을 담고 있어요. 그렇다고 그가 경험한 하나님 세계가 전부라고 말하진 않죠. 길을 잃은 젊은이들에게 위로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위로하게 하셨는지, 폭력과 불의에 맞섰지만 무기력한 모습 앞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게 하셨는지, 그 진솔한 고백들이 들어 있으니 한 번쯤 읽어 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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