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몸과 등에 매달려 온 그 인생처럼

로맹 롤랑의 〈미켈란젤로 예술과 인생〉을 읽고서

by 권성권
unnamed.jpg 제미나이가 만든 사진


엊그제 입춘을 맞이한 것 같은데 벌써 우수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올겨울엔 목포 지역에 두 번 정도 많은 눈이 내리지지 않았나 싶어요.

매서운 한파도 세 번 정도는 지나간 것 같아요.

눈이 쌓일 때마다 내가 한 일이 있습니다.

예배당 앞 마당과 지나가는 길에 쌓인 눈을 치우는 거였죠.

사람들이 들고 날 때, 앞길 도로를 지나갈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헤아려주고픈 마음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한 일도 있습니다.

예배당 옆 작은 텃밭에 쌓인 눈을 밟아주는 거였어요.

눈을 밟는다기보다 눈 속에 쌓인 마늘과 양파의 뿌리를 밟아주는 거였습니다.

뿌리와 흙 사이에 생길지도 모를 공기 틈새를 메꿔줄 수 있으니까요.

유달산이나 월출산에 오를 때도 길목의 들풀을 밟아주면 더욱 단단하게 자라듯 말입니다.

녀석들은 그만큼 스스로 자란 것 같지만 사람들의 밟힘 속에서 더 견고하게 서지 않나 싶어요.



“나는 돌 속에 갇힌 천사를 보았다. 그래서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 조각을 했다.”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로맹 롤랑’의 〈미켈란젤로 예술과 인생〉(본투비·2025)에 나오는 말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예술이 돌을 깎아내는 기술이 아니라 그 속에 잠든 신성을 해방시키는 일로 여겼다는 것이죠.

무의미한 돌 속에서 신의 형상을 보려고 하듯이 그의 처절한 고독과 투쟁의 서사를 담은 책입니다.



1475년, 몰락해가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을 듭니다.

6살 때 병약한 어머니를 잃은 그는 석공인 유모의 남편처럼 어머니의 젖 대신 돌가루와 정을 먹고 자란 까닭이죠.

청년기 땐 피렌체의 지배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의 눈에 띄어 조각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그때 동료의 주먹에 코뼈가 주저앉는 사고로 일그러진 자화상 속에서 열등감에 빠져들죠.

하지만 그 고립감은 그를 더 우직하게 만들었는데 20대에 〈피에타〉와 〈다비드〉를 완성하며 신의 손을 가진 조각가로 우뚝 서게 되죠.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를 로마로 부릅니다.

교황은 자신을 위한 불멸의 무덤을 만들라고 하지만 변덕과 예산 부족으로 번번이 무산시키죠.

그 후 조각가인 그에게 붓을 쥐어 주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도록 명령을 하죠.

라이벌 브라만테와 라파엘로가 벌인 음모였지만 그는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작업대에 가두며 4년간 거꾸로 매달린 채 창조와 타락,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그리죠.

천장 가득 펼쳐진 ‘창세기’는 단순한 그림을 넘어 인간이 손끝으로 하나님께 닿으려는 육체와 영혼의 대화를 그린 세기적인 작품입니다.



89세의 그는 죽음을 맞이하기 사흘 전까지 ‘피에타’를 조각합니다.

그 조각상은 젊은 시절에 조각한 바티칸의 <피에타>와는 다른 모습이죠.

현재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는 완벽한 비례와 매끄러운 피부로 기교를 부린 거지만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에 있는 <론다니니 피에타>는 거칠고 투박하다고 하죠.

젊은 시절의 <피에타>는 어머니가 아들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지만 죽음 직전까지 다듬은 <피에타>는 뒤로 돌아가 보면 어머니가 아들을 ‘업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요.

마치 어머니의 몸속에 아들이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들의 등에 어머니가 매달려 위로받는 모습 말이죠.

올여름 그곳을 방문한다면 89세의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까지 깎고자 한 게 무엇인지 더 깊이 헤아릴 수 있겠죠.



“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니라 모세가 성막을 세우되 그 받침들을 놓고 그 널판들을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그 기둥들을 세우고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를 덮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출40:17-19)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지 1년이 지난 2년 1월 1일 성막을 세운 모습입니다.

‘세우다’는 말이 반복되는데 히브리어 ‘쿰(קוּם)’은 ‘일어서다’ ‘확립하다’는 말이예요.

가인이 아벨을 보고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을 때 사용된 단어죠.

물론 ‘쿰’은 그런 의미를 넘어서는 깊은 뜻이 있어요.

400년간 살아온 익숙한 애굽의 환경을 벗어나 새로운 광야로 가는 길목에 마주할 낯섦을 이겨내도록 하나님께서 등에 업고 세우시는 것 말이죠.

16년간 중단된 성전 재건도, 회당장의 죽은 12살 된 딸도 주님께서 다시 살려 세우듯요.



며칠 있으면 설날입니다.

입춘과 우수 사이에 있는 설날인데 ‘설’의 어원은 분분한 것 같아요.

그나마 ‘낯설다’는 어근에서 온 말로 다들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설’이 아직 익숙하지 못한 ‘낯선’ 날이므로 삼가는 마음으로 맞아야 한해 인생을 잘 세울 수 있다고 말이죠.

하지만 자기 마음가짐과 달리 주변 방해와 공격도 만만치 않는 게 인생이죠.

그래도 밟히면 밟힐수록 마늘과 양파처럼, 들판의 들풀처럼 더 견고하게 살아갔으면 해요.

미켈란젤로도 황제의 공격과 동료들의 음모 속에서도 꿋꿋하게 인생을 세워갔으니까요.

물론 그 인생은 <론다니니 피에타>처럼 신의 몸과 등에 매달려 왔듯이 마지막까지 주님께서 세운 인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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