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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tle Creatures Mar 19. 2020

아들과 발리여행

사내 둘이서도 재미있을까?

[시기:2015.6 / J:초6 / 장소:발리]


원래 J와 단둘만의 여행은 염두에 없었다.

P는 고등학생으로 대입시험 준비를 위해서 여름방학 동안 우리나라에서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이때는 사우디에서 시작한 메르스가 유행하는 시기였고 잠깐의 고민이 있었지만, 대학입시를 앞둔 P의 학원을 생략할 수는 없었다.


RJ는 사내 둘만 호주에 남겨두고 가는 게 걸린다며 싫어하는 척했지만 본심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P를 혼자 한국으로 보내기 불안하고 뒤치닥꺼리를 해줘야 하며 병원도 갔다 와야겠다는 이유를 에둘러 대어가며, 결국에는 P와 같이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졸지에 사내 둘만 호주에 남겨지게 되었고, J는 엄마와 누나가 우리나라로 놀러 가는 것으로 읽혀져서, 같이 가지 못해 아쉬워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마침 나도 회사일에 여유가 있어 에어아시아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항공 특가 상품을 발견하고는 살짝 고민에 빠졌다. J와 단둘이 가는 사내들만의 여행이 흥미를 돋우었고 또 생각보다 싸게 나온 하드락 발리호텔이 P가 생후 6개월에 데리고 갔었던 호텔이라는데 굳이 의미를 부여하여 쉽게 결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여행 첫 날-가방이 안 왔어요]

J는 최근 아데노이드 비대증 수술을 했는데도 며칠 괜찮았다가 다시 코가 막혀, 비행기 타기전에 약을 먹였더니, 발리까지 가는 3시간 30분 동안 계속 잔다. 다행히 기내가 따뜻했고, 우리가 앉은 3좌석에 옆자리가 비어 편하게 갈수 있었다.


발리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수영용품 가방이 나오지 않는다. 설마설마하며 기다렸는데 끝내 나오지 않았고 결국 Lost&Found 코너에 신고하고 나니 1시간 이상 지체되었다.


수영용품 가방에는 수영복, 래시가드, 물안경과 물놀이 용품이 가득 차 있는데, 수영장에서 놀 기대를 잔뜩 하고 있는 J는 내일 아침부터 당장 걱정이 되나 보다. 어떡하냐고 자꾸 물어본다.


[둘째 날-수영장에서 하루 종일]

어젯밤 늦게 도착하기도 해서 피곤하기도 하고 휴가답게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7시에 J와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일찍 깨서 아빠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아침부페는 해외여행에서 항상 먹어왔던 베이컨에 볶음밥을 오늘도 변함없이 양껏 먹었다.


당장이라도 수영장에 뛰어들고 싶은 J를 데리고, 수영복과 래시가드를 사러 근처를 걸어 돌아다녔다. 디자인과 가격 대비 성능을 따지느라 더운 날씨에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더니 J의 짜증이 만땅이다. 지는 아무거나 괜찮단다. 재빨리 J는 Arena 나는 Rip Curl로 한 벌씩 맞춰 입고 SPF 110짜리 선블록을 사서 얼른 호텔 수영장에 몸을 던졌다.


J는 수영장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수영장이 넓고 깊고 또 일부 수영장 바닥에 모래가 깔려있어 수영장에 넣어주는 순간부터 점심시간까지 혼자서도 잘 논다. 나는 풀 바에 앉아 가끔 J를 안아 높이 던져주기만 하고 빈땅맥주로 휴가를 만끽했다.


점심 식사를 위해서 잠깐 나와서 내일 래프팅 예약과 서핑 예약을 완료하고 환전을 했다. U$ 200을 바꿨더니 현지 루피아를 한 다발 준다. 오후에 다시 수영장으로 와서는 오전과 같이 놀았다.


이렇게 계속 놀면 손과 발에 물갈퀴가 생기는 게 아닌지 잠깐 걱정스러웠다.

J는 엄마와 누나도 같이 왔으면 너무 좋았겠다고 아쉬워했다. 아주 잠깐만...


[셋째 날-래프팅]

피곤하지도 않은가 보다. 나보다 일찍 일어난 J는 건강의 상징인 모닝 바나나 X를 션하게 마친 상태였다.

지겹지도 않은가 보다. 여전히 아침은 삼겹살과 볶음밥이다.


오늘은 J의 기대가 대단한 뜰라가자와 강 래프팅이 있는 날이다.

그런데 어제 예약할 때 차를 타고 가는 데만 2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약국에서 멀미약을 사두었는데 포장이 믿음직스럽지 않다. 아침에 먹일까 말까 고민하다가 삼겹살 사이에 살짝 밀어 넣었다. J는 가는 2시간 내내 거의 잔다.


드디어 래프팅 출발. 약 14 킬로미터를 2 시간에 거쳐 내려간다고 한다. 보기에는 물살도 빠르고 암석이 많아 위험해 보였지만, 실제로 가이드의 구령에 맞추어 노를 저으며 내려가보니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익숙해지자 지겨워졌다. 타고 내려오는 재미보다는 "노"를 이용해서 옆 보트 사람들에게 물을 튀기며 노는 게 더 재미있어졌다. 그랬더니 2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시장이 반찬인지 선뜻 선택할게 없어 보이는 점심에서 J는 볶음면과 닭튀김을 배부르게 먹고는 돌아오는 2시간은 약을 먹이지 않았는데도 코까지 골며 잔다.

[뜰라가자와강 래프팅]

4시경에 복귀한 나는 피곤하다. J는 어젯밤에 도착한 수영가방에서 수영장 놀이기구를 찾아내서 벌써 수영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있었다. 다시 2시간을 에너자이저처럼 놀고 와서야 뜨거운 목욕물에 둘이서 엉덩이를 끼워 앉아 휴식을 취한다.


저녁으로 시킨 룸서비스 메뉴는 나시고랭과 싱가포르 누들.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둘이서 배들 손으로 받쳐가며 먹었다. J는 그렇게 먹고 나서 나오는 방귀를 손으로 잡아 내 코에 들이 미는데 어린아이 냄새가 아니다.


지금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가지고 온 만화책과 아이패드의 러닝맨을 오가며 휴식을 만끽하고 있다. 영어 소설책인 톰 게이트는 다시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고 굳이 가져온 구몬 학습지는 꺼내지도 않았다.


[넷째 날-서핑]

오늘도 새벽 6시에 J와 눈이 마주쳤다. 내일부터는 눈을 뜨지 말아야겠다.

마치 아침 일찍부터 투어가 있다는 듯 바로 둘이서 손잡고 아침 뷔페에 갔다가, 수영장을 들렀는데 아직 오픈 전이라 청소 중이었다. 다행이다.

그래서, 오늘 있을 서핑 레슨을 위해서 호텔 앞 쿠타 비치로 나가 보았다. 생각보다 파도가 높고 거칠어 오늘 서핑이 살짝 걱정되었다.


잠시의 짬이라도 최대한 활용하는 J는 서핑전에 수영장에 들렀다 가자고 한다.

다행히, 물이 따뜻해서 생각보다 괴롭지는 않다. 풀 바에서 마르게리타 피자와 콜라 한 잔을 먹인 후, 서핑 바지를 입히고 SPF 110 선블록을 떡칠해서 해변으로 나갔다.


아침의 거친 파도에 놀란 나는, J와 같이 배우려고 예약했던 2인 레슨을 개인 레슨으로 변경하고, J를 계속 눈으로 따라다니며 비상사태에 대비하려 했다.

해변 모래사장에서 잠시 기본자세를 배우고는 바로 바다로 들어간다. 아침 일찍과는 다르게 파도는 약간 약해져 있었고 해변에서 멀리 나가도 수심이 깊지 않은 게 아빠를 안심 시켰다.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가 생겨 돌아보니 어른 팀 여럿이 서핑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서핑보드에 올라가지 못하고 넘어지고 뒤집어지고 있었다. J는 기특하게도 첫 번째 시도에서 보드 탑승에 성공하고 서서히 즐기는 단계이다. 뭐든지 어릴 때 배워야 하나보다. 후반 레슨에 혼자서 보드를 저어서 나가고 돌리는 고급 기술을 연마 중에 약간 상처를 입어 서둘러 마무리를 했다.

J는 호텔로 돌아오면서 수영장에서 잠깐 힐링하고 가잔다. 아빠는 당연히 그 꼬임에 쉽게 넘어간다. 나를 풀 바에 앉혀놓고 나초 하나와 모히또를 마시게 해준다. 수영장 물도 엄청 먹인다.


저녁외식 하고 돌아오는 길에 J는 팔짱을 끼면서 아빠를 배려한다는 듯 말했다,

"아빠가 수고했으니까, 내일은 일정 없이 하루 종일 힐링하자. 수영장에서."

일찍 자야겠다. 내일 같이 힐링하려면...

놈은 벌써 잔다.


[다섯째 날-수영장에서 힐링]

J는 아침부터 수영장에서 힐링하자고 강하게 치고 나온다.

위기다.

난 "느낌 아니까!", 아빠 손에 물갈퀴가 자라나고 있다고 하면서, 점심이라도 나가서 맛난 것을 먹자고 꼬드겨 "포테이토 헤드"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침 내내 다시 고문을 당하고 포테이토 헤드로 갔다. 발리의 악명 높은 교통체증에 택시 타고 오가는 시간이 엄청 지루하다. J는 오가는 내내 우리 가족의 전통 놀이인 "묵찌빠"와 벌칙으로 아빠를 즐겁게 해준다. 그렇게 3시간을 빼서 간 포테이토 헤드는 분위기는 좋았으나 음식은 특별하지 않았다.


점심 출발 전에 호텔 키즈클럽에 예약한 Rock Climbing과 Giant Ballon이 오후에 예정되어 있다. 나에게는 수영장에서 노는 것보다 훨씬 나은 옵션이다. 재미있을 것 같았던 2개의 액티비티는 J 말에 따르면 Rock Climing은 힘들고 Giant Ballon은 덥고 숨쉬기 어렵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편안했다.


마지막 저녁을 나가서 맛있는 걸로 먹자고 제안했지만, J는 단호하게 룸서비스를 선택했다. 기존 메뉴에 컵라면과 마지막 날 특식으로 크리미 갈릭 스파게티를 추가했더니 빵도 몇 개 따라 나왔다.

다 못 먹을 줄 알았다.

알뜰히 다 먹었다.


J는 이틀째 양치를 하지 않고 있다. 어떻게든 오늘은 시켜야 하는데 배 쓰다듬으며 강호동의 1박2일을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다.

잔다. 깨우지 못했다.

옆에 누우니 입 냄새가 난다. 근데 아빠는 좋아... 이 냄새.


[여섯째 날-돌아가는 날]

아침부터 J가 우울하다.

발리를 떠나는 건 슬프지 않으나 내일(금요일)부터 학교 가는 게 우울하단다.

J는 사실 어젯밤부터 금요일에 학교가면 안 되는 갖가지 이유를 개발하여 아빠를 설득하였으나 실패한 바 있다. 그러자 J는 오늘 아침 뷔페에서 삼겹살을 빵에 싸먹는 기이한 식성을 보여주며 자기주장을 다른 방식으로 어필한다.

Nice Try.


그동안 호텔에서 시켜 먹은 룸서비스와 풀 바에서 먹은 음식 비용이 2.6백만 루피(20만 원가량) 나왔다. 인도네시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곳이 발리이고 5성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호텔에서 주구장창 시켜 먹은 룸서비스와 풀 바 비용 그리고 호텔 액티비티와 공항 픽업을 포함하면 상당히 착하다.


J는 비행기 타고 오는 내내 말도 안되는 다른 이유를 들어가며 다시 아빠를 설득했고, 나는 당연히 넘어가서 월요일부터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사내들만의 발리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에필로그]

아들하고 둘이만 가는 여행은 약간 두려움이 있었다.

J를 잘 챙겨줄 수 있을까? 둘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둘이서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 등등


나에게 무엇보다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J와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J는

- 공항 가는 내내 작년 10월의 악몽(발리 가족여행 취소)을 끄집어내어 조근조근 조잘댔고

- 비행기에서는 약기운에 잠잘 때만 빼고는 계속 조잘조잘

- 새벽에 눈 마주치자마자 눈도 다 안 뜨고 꿈 이야기를 시작으로 조잘조잘

- 아침식사하면서는 삼겹살과 갖가지 먹는 이야기로 조잘조잘

- 수영장에서는 온갖 게임을 만들어내고 아빠 술 많이 마신다고 잔소리하고 물속에서도 조잘조잘

- 투어 길, 쇼핑 길, 외출하는 길만 아니라 호텔에서 수영장을 오가는 길에서도 아빠 팔짱 끼고 조잘조잘

- 특히 저녁에 자면서는 아빠 쪽으로 누워서 입 냄새 풍기며 자는 순간까지 조잘조잘

나는 이것만으로 이번 여행이 충분히 기대 이상으로 즐겁고 의미 있었다.


이 즐거운 기억으로 2017.7월 "사내들만의 여행" 2차를 일본으로 가게된다.

아들이 있는 아빠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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